한국 경제의 체질적 제약이 국제무대에서 공식 확인됐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1일(현지시간) IMF에서 “한국은 국제 통화가 아니기 때문에 미국·유럽이 사용한 양적완화(QE)나 수익률곡선통제(YCC)를 모방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단순한 정책적 한계 지적이 아니라, 한국의 성장 모델·산업 구조·자본조달 방식을 모두 다시 계산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창용 총재는 고령화·생산성 둔화·글로벌 공급망 재편·금융 불안이라는 네 가지 축을 동시에 언급하며, 한국 경제가 “통화정책만으로 버틸 수 있는 시대가 끝났다”고 사실상 선언했다.
이 발언은 산업별로 구조적 충격을 초래한다. 금리·환율·자본비용의 상관관계가 과거와 달라졌고, 기업들은 투자·조달 전략을 근본적으로 다시 짜야 한다. 이번 발언이 단순한 해외 강연이 아니라 향후 한국 경제 정책의 좌표를 미리 제시한 신호라는 점에서 의미는 더 크다.
이 총재가 강조한 구조적 제약은 한국 제조·수출 산업의 ‘환율 탄성’을 재측정해야 한다는 문제로 이어진다. 한국 대기업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긍정적으로 평가해도 5~7% 수준(반도체·자동차 제외)이다. 환율이 1%만 변해도 기업 수익률은 0.3~0.6% 즉각 변동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한국 제조업의 해외 중간재 비중이 평균 32%에 달한다. 둘째, 글로벌 공급망 변화로 특정 지역 의존도가 높아져 원가 구조가 환율에 과도하게 노출돼 있다. 이 총재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통화정책의 핵심 변수로 언급했다. 이는 한국 제조업이 미국·유럽처럼 금리 인하를 통해 비용 압력을 상쇄하는 전략을 사용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금리를 내릴 경우 원화가 약세로 가면서 오히려 원가가 상승하는 ‘정책 역전 효과’가 발생한다.
즉, 한국 제조업은 저금리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구조적 산업임이 한국은행 총재 발언으로 확인된 셈이다. 기업은 금리가 아니라 환율 기반의 투자 검증 체계로 전환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반도체·배터리 같은 고정자산 투자 비중이 큰 산업은 금리 변화가 자본조달 비용(WACC)에 직접 반영되는 구조다. 예를 들어, WACC가 6%인 기업에서 금리가 0.5%p 오르면 → WACC는 6.5~6.7%까지 상승하고 → 장기 팹 투자(10~20조원급)의 순현재가치(NPV)가 20~30% 훼손된다.
이창용 총재가 “한국은 양적완화나 장기 저금리 정책을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한 순간, 기업의 대규모 설비투자 판단 기준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다. 한국은 금리를 내리는 순간 △원화 급락 △외화표시 부채 부담 증가 △외인 자본 유출이 동시에 발생해 오히려 금융시스템 불안이 커진다.
결국 첨단 산업들은 금리 인하를 기대할 수 없고, 환율 헤지·외화 조달 다변화·공급망 분산 같은 전략적 대응만 가능하다. 이창용 한은 총재의 발언은 사실상 “대규모 설비투자는 환율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선언이다.
총재가 가장 강조한 것은 “금융안정이 통화정책 핵심이 됐다”는 대목이다. 한국은 가계부채가 GDP 대비 105%, 기업부채는 116% 수준이다. OECD 평균 대비 각각 1.6배, 1.4배 높다.
이 구조에서 금리를 내리면 → 원화 약세 → 외국인 채권 이탈 → 단기금리 급등 → 비은행권 자금경색 이라는 위험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 반대로 금리를 올리면 → 가계부채 상환 불능 위험 → 부동산 PF 불안 → 금융기관 부실화 가 곧바로 뒤따른다.
이창용 총재의 발언은 한국 경제가 “금리를 움직일 때마다 금융불안이 먼저 반응하는 구조”임을 명확히 드러냈다. 이는 미국·유럽과 완전히 다른 구조이며, 한국은행의 금리 결정이 물가보다 금융안정에 사실상 종속되는 상황이 이미 정착됐다는 의미다. 즉, 한국의 통화정책은 ‘물가→금리’가 아니라 ‘금융안정→금리→물가’ 순으로 재편됐다.
부동산 PF는 이 구조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다. 저금리 완화는 PF 부실채권을 확대시키며, 금리 인상은 상환 압력을 키운다. 이 총재의 발언대로라면 한국은 PF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 금리 결정이 묶이는 시대에 진입했다.
한국은 원유·가스·석탄·광물 수입 의존도가 93%에 달한다. 원화 약세가 발생할 경우, 에너지 기업의 원가 구조는 즉시 악화된다. 미국·유럽은 양적완화로 환율 방어가 가능하지만, 한국은 양적완화를 하는 순간 외환시장이 먼저 무너진다. 이창용 총재가 “한국은 기축통화가 아니라서 동일한 정책을 사용할 수 없다”고 반복한 이유다.
에너지·정유·화학 기업은 △장기 고정가격 계약 △조달국 다변화 △환율 헤지 비중 30~40%까지 상향이 사실상 필수 전략이 된다. 한국 경제는 환율 변동성이 실물 산업의 ‘비용 변동성 극대화’로 직결되는 구조임이 다시 확인됐다.
이 총재는 고령화·인구 변화가 통화정책의 효과를 약화시키고 있음을 명확히 지적했다. 이는 한국 내수 구조가 금리 변화에 덜 반응하는 ‘수요 경직성 경제’로 이동하고 있음을 뜻한다. 금리를 내려도 △의료·노령 지출 증가 △부채 상환 부담 유지 △저출산으로 소비 기반 축소가 동시에 발생해 내수 진작 효과는 과거 대비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
이는 한국 경제가 “금리로 소비를 살리는 시대가 이미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재정 △복지△구조개혁이 내수정책의 중심으로 이동했음을 총재 스스로 재확인한 것이다. 총재는 IMF 발표 말미에 디지털 화폐·스테이블코인 정책을 직접 언급하며 한국은행이 이 분야에서 역할을 확대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결제·핀테크·은행·빅테크의 경쟁지형을 전면 재편하는 의미다.
디지털통화 실험 확대는 △민간 지급결제 시장 규제 강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유통의 중앙은행 승인제 도입 △은행·빅테크의 결제시장 지위 경쟁으로 연결된다. 한국은행이 ‘금리 조절 기관’을 넘어 결제 인프라 운영자·디지털 규제기관으로 이동하는 구조적 전환이 이미 시작됐다는 신호다.
한국이 QE나 YCC를 실행할 수 없다는 총재의 발언은 환율 경로가 통화정책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정책의 제약조건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실제로 원‧달러 환율이 1450원을 넘어설 경우 제조업 원가는 3~6% 상승하고 반도체·배터리 산업의 조달비용도 5~8% 늘어나며, 항공·해운업의 연료비는 7~10% 급등해 실물경제 전반의 비용 구조가 즉각 압박을 받는다.
비은행권의 외화차입 리스크까지 확대되면서 한국은행은 금리 인하를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에 몰린다. 환율이 1350원 수준을 유지할 때는 수출환경이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내수는 둔화되고, 부동산 PF와 가계부채의 위험이 완만히 확대되면서 금리 동결이 사실상 최적 선택지가 된다.
반대로 환율이 1250원대로 하락하면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비용 구조가 개선되고 외국인 자금이 유입되면서 금리 인하 여력이 생기지만, 금융시스템 취약성을 고려하면 과감한 완화정책 시행은 여전히 제약된다. 결국 총재의 이번 발언은 한국이 어떤 환율 국면에 처하더라도 통화정책의 자율성이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구조적 현실을 드러낸 것으로, 한국은행이 시장을 따라가는 기관이 아니라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스스로 움직임을 제한해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이번 IMF 발언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한국 경제의 전환점을 국제사회에서 명확히 규정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는 단순한 통화정책 논평이 아니라 한국 경제가 더 이상 미국식 통화정책 모델을 적용할 수 없으며, 향후 정책의 중심축을 산업정책과 구조개혁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구조적 선언에 가깝다.
금리 조정만으로 경기를 조절하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고, 고령화·글로벌 공급망 재편·금융불안이라는 거대한 구조 요인들이 통화정책의 영향력을 압도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산업별 비용 구조 역시 환율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기업 전략과 정부 정책이 모두 외환 변동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체제가 굳어지고 있으며, 디지털 통화·스테이블코인 등 새로운 금융 질서 속에서 한국은행의 역할은 전통적 금리 조절 기관에서 결제·규제 플랫폼 운영자로 확대되고 있다.
한국 경제는 지금 성장–금리–환율이라는 낡은 3각 구도를 벗어나 구조개혁–산업정책–금융안정이라는 새로운 3대 축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있으며, 이번 IMF 발언은 그 변화를 한국은행 총재가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천명한 첫 신호다. 앞으로의 경제정책은 이 전환을 기준점으로 삼아 재정, 통화, 산업전략을 모두 재설계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Copyright ⓒ 뉴스로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