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고속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마치 현대 미술관 같은 유리탑이 눈에 띈다. 커다란 투명 건물 속에는 중고차들이 층층이 정렬돼 있고, 방문자는 거대한 자판기에 동전을 넣듯 차를 '인출'한다. 바로 미국 온라인 중고차 유통 플랫폼 카바나(Carvana)의 상징이자 야심작인 ‘차량 자판기(아래 사진)’다.
이 기이하면서도 매혹적인 구조물은 전통적인 자동차 판매 문화를 뒤엎겠다는 젊은 기업가의 의지를 담고 있다. 그 주인공은 어니스트 가르시아 3세(Ernest Garcia III·43), 아직 40대 초반의 창업자다.
카바나는 2020년 팬데믹 시기에 한때 미국 중고차 시장의 구세주처럼 떠올랐다. 비대면 거래 수요의 폭발과 함께 주가는 10배 넘게 상승했다. 하지만 불과 2년 후, 이 상장사는 월가의 악몽으로 전락했다. 고금리와 과잉 확장의 덫에 걸린 카바나는 주가가 97%나 폭락(아래 주가 그래프)하면서 2022년 말에는 파산설까지 나돌았고, 창업자인 가르시아 3세는 개인 보유 지분으로도 회사를 지탱하기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
그럼에도 그는 회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구조조정과 채무 조정을 통해 가까스로 버텨낸 카바나는 2024년부터 주가가 다시 반등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2025년 하반기에는 회복의 모멘텀을 확보한 상태다.
지난 5일에는 개장전 카바나가 S&P500 지수에 편입된다는 발표 이후 9%나 급등해 사상최고가를 경신했다,
그러나 회복의 기세 이면에는 뿌리 깊은 구조적 위험이 남아 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 는 “자동차 자판기를 만든 남자가 이제 불 꺼진 자판기 속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 평가했다. 포브스>
스탠퍼드 출신의 '이단아', 자동차 유통을 뒤집다
어니스트 가르시아 3세는 애리조나 출신으로,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경영과 공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그의 창업 경로는 전형적인 실리콘밸리식 스타트업 창업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가족 사업인 드라이브타임(DriveTime)에서 경영 경험을 쌓으며 커리어를 시작했다. 부친 어니스트 가르시아 2세는 금융 및 부동산 업계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로, 자동차 금융 회사 드라이브타임의 회장이었다.
가르시아 3세는 2007년 드라이브타임에 합류한 뒤, 오프라인 중심의 자동차 판매 방식을 비효율적이라 느꼈고,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구매 경험 개선을 고민했다. 그 결과물이 2012년 ‘사내 스타트업’으로 출발한 카바나였다. 그는 이내 회사를 분리, 독립 법인으로 키우며 외부 투자자들을 끌어들였다.
“사람들은 소파에 앉아 클릭 몇 번으로 식사를 주문할 수 있는데, 왜 차는 직접 나가서 사야 하나?”
그는 그렇게 묻고, 대답했다.
2017년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당시 카바나의 주가는 주당 11달러(약 1만4천 원)였으나, 팬데믹 중반기인 2021년 8월에는 360달러(약 47만 원)까지 치솟았다. 순수 온라인 기반 자동차 유통이라는 개념은 시장에서 극찬을 받았고, 차량 자판기라는 기이한 마케팅 전략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자회사처럼 운영되던 물류 시스템, AI 기반 가격 예측 시스템, 자체 대출 플랫폼까지 더해져 카바나는 '모빌리티 플랫폼'으로 확장될 가능성도 주목받았다.
한계의 신호탄, 팬데믹 후 거품의 붕괴
그러나 시장의 찬사는 오래가지 않았다. 연준의 금리 인상, 공급망 교란, 중고차 가격 급락이 겹치며 카바나의 약점이 드러났다. 고속 성장에 의존한 재무 구조는 급격히 흔들렸다. 공격적으로 확장한 물류 허브와 자판기 건설, 재고 매입 등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됐고, 이 과정에서 단기 부채는 80억 달러(약 10조4천억 원)를 넘겼다. 이자 비용만 연간 수천억 원에 달했고, 수익성은 곤두박질쳤다.
2022년 카바나는 연간 순손실 6억5천만 달러(약 8천5백억 원)를 기록했다. 같은 해 주가는 97% 하락해 단 4달러(약 5천 원)대까지 폭락했다. 시장은 회사가 유동성을 잃었다고 판단했고, 일부 신용 평가사들은 디폴트 위험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창업자인 가르시아 3세는 보유 지분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며 회사를 지탱하려 했으나, 이조차도 한계에 다다른 시점이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는 너무 빠르게 달렸다. 그리고 그 속도를 감당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다시 일어서는 실험: 회복을 향한 정비
2023년 중반 카바나는 대규모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비수익 물류 허브를 폐쇄하고, 일부 자산을 매각해 현금 유동성을 확보했다. 동시에 채권단과의 협상을 통해 일부 부채 상환 일정을 재조정했다. 카바나는 또한 중고차 재고 보유 전략을 조정해 수요 예측 중심의 경량 구조로 전환을 시도했다.
이러한 노력은 2024년부터 주가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2025년 3분기 기준, 카바나의 주가는 60달러(약 7만8천 원)를 넘어섰으며, 일각에서는 “기업 구조 전환이 성공적으로 진행 중”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투자사 JP모건은 최근 보고서에서 “영업현금흐름이 흑자 전환에 근접했고, 구조적 효율성 면에서 과거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불안정한 회복이다. 핵심 사업 부문의 수익 구조는 완전히 개선되지 않았고, 자기자본은 여전히 마이너스다. 구조조정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재무 분석가 리사 브루넬은 “카바나는 살아남기 위해 회사를 가볍게 만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본래의 확장 가능성을 상당히 줄였다”고 지적했다.
경쟁사와의 비교: 빠르지만 불안한 질주
카바나가 경쟁하고 있는 미국 내 주요 중고차 업체로는 카맥스(CarMax), 브룸(Vroom), 리디아 모터스(Lithia Motors) 등이 있다. 이들 기업과의 구조적 비교는 카바나가 처한 현실을 더 분명히 보여준다.
카맥스는 오프라인 딜러망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매출과 수익 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팬데믹 기간에도 영업이익을 유지했다. 리디아 모터스는 신차 브랜드 유통을 병행하는 복합 플랫폼으로, 중고차 시장 침체기에도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반면 브룸은 카바나와 유사한 온라인 기반 모델을 운영하다가 극심한 손실과 투자 유치 실패로 구조 조정에 들어갔다.
카바나는 이들 중 가장 급진적인 디지털 전략을 추진했지만, 동시에 가장 큰 리스크에 노출된 기업으로 꼽힌다. 실제로 2022년까지의 재무자료를 보면 카바나는 총자산 약 65억 달러(약 8조5천억 원)에 대해 총부채가 83억 달러(약 10조9천억 원)를 넘어서며 자본잠식에 근접한 상태였다.
기술과 금융의 교차로, 다음 기회는 어디에
카바나의 회복 가능성은 여전히 기술적 진보에 기댄다. 회사는 AI 기반 재고 관리, 중고차 가격 예측 알고리즘, 사용자 맞춤형 대출 상품 등으로 수익 구조를 다양화하고자 한다. 최근에는 차량 구독 서비스, 판매자 전용 입찰 플랫폼 등 신사업 파일럿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진정한 위기 극복은 기술보다 구조에 달려 있다. 시장은 이제 ‘차량 자판기’의 시각적 충격보다는 기업의 재무 건전성과 장기 생존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어니스트 가르시아 3세는 여전히 경영 최전선에 서 있으며, 최근에는 내부 구성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업계를 바꾸려 했다. 이제는 회사를 지켜야 할 시간이다.”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과거의 상징이 미래에도 유효할 수 있을까. 그리고 혁신가가 경영자로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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