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사람’(2022)
한겨울의 독서라니. 그림 속에 앉아 있는 여인의 사연이 궁금했다. 이 낯설고 이국적인 겨울 풍경은 2022년 초겨울, 학고재 신관에서 열린 김은정 작가의 개인전에서 만났다. 핑크빛 하늘 아래로 설산이 걸려 있고, 호수에는 하얀 덩어리들이 뭉게뭉게 떠 있다. ‘뭉게뭉게’라고 한 이유는 눈이 아니라 구름이 반사된 모습이어서다. 작가는 튀니지 여행에서 목격한 사람을 소재로 삼았다고 했다. 해변에 앉아 오래도록 책을 읽던 히잡 쓴 여인의 모습을 작가는 겨울 호수로 옮겼다. 무릇 겨울 독서란 따뜻한 안방에서 귤 까먹으며 하는 것 아닌가.
작품이 그려진 시기는 팬데믹 때다. 작가는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책 읽는 사람을 상상하며 “불확실한 변화들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읽어내는 사람이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1년여를 외국에서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내게도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기도 했다. 10℃도 못 미치는 날씨에 웃통을 벗어 던지고 운동하는 남유럽의 청년들, 나무에 새순이 돋았지만 여전히 으스스한 3월의 잔디밭에 누워 수다를 떨던 런던의 학생들, 주변 나무에 기대 앉아 책을 읽는 사람. 내가 만난 읽는 사람들이다. 김은정은 매일의 날씨와 일상 경험을 소재로 마치 일기를 쓰듯 작업한다. 〈매일매일 ( )〉이라는 전시 명 속 빈 괄호는 일상의 우연성을 가리킨다. 비워 둔 공백은 자꾸 어긋나는 일기예보처럼 예측할 수 없는 하루하루다. 지난가을 다시 학고재에서 김은정의 개인전이 열렸지만 게으른 나는 전시를 놓치고 말았다. 괜스레 아쉬워 옛 사진첩을 뒤적이다 발견한 겨울을 더듬어 본다.
by 김슬기, 〈탐나는 현대미술〉 저자
김종학, ‘설경’(2015)
설경은 겨울이 주는 선물이다. 눈은 계절의 화장을 지운다. 흰 눈은 봄의 붉음, 여름의 푸름, 가을의 황금빛까지 조용히 덮는다. 화장기 없는 겨울의 민낯은 색으로 존재하던 자연을 선(線)의 세계로 이끈다. ‘설악산의 화가’로 불리는 김종학. 강렬한 붓질과 화려한 색채로 자연을 그리는 그의 탁월함은 역설적이게도 눈으로 뒤덮인 겨울 풍경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두터운 마티에르의 유화는 바위산 설악의 장엄함을 떠받치고, 빠른 붓질의 흔적과 나이프 자국은 겨울의 엄숙함을 그린다. 그 단정한 침묵은 장식이 사라진 본질의 자리다. 겨울 추위는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공포지만, 잠든 생명에게는 가장 깊은 안식이다. 견뎌야 하는 동시에 기르는 시간이며, 봄을 위한 힘을 비축하는 시기다. 그래서 김종학의 설경은 차가운 백색이 아니라 따뜻한 흰 빛이다. 그 눈은 봄이 오면 다시 피어날 생명들을 포근히 감싸 안은, 도톰한 솜이불과 같다.
고흐의 아를, 고갱의 타히티, 모네의 지베르니처럼 김종학은 설악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화풍을 찾아냈다. 젊은 시절, 당대 가장 전위적인 추상미술에 심취했던 그는 1970년대 후반 설악산으로 들어갔고, 제멋대로 피는 야생화에서 생명의 원리를 봤다. 서양의 재료와 색감을 쓰지만 만물 평등의 민화적 구도와 과감한 생략으로 동양의 정신을 배열했다. 그의 그림이 구상이자 추상이요, 동양화와 서양화가 공존한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생 빅투아르 산을 마주한 세잔이 그러했듯 김종학은 설악산의 사계절을 반복적으로 그렸다. 〈동국여지승람〉에서 8월 대보름에 시작된 눈이 이듬해 하지가 돼야 녹는다는 설악의 정수는 단연 눈 내린 겨울 풍경이다. 능호관 이인상의 ‘설송도’처럼 뼈만 남고 기만 응축된 절대 풍경,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같은 절개와 겸양의 붓질은 수 십 년에 걸친 단련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눈밭에 발자국이 없다. 인간의 흔적이 닿지 않은 고요의 풍경에서 화가는 자연의 숭고를 본 것이 틀림없다. 요동치는 마음을 덮고, 생명의 숨을 품고 있기에 더욱 아름답다.
by 조상인, 〈살아남은 그림들〉 저자
Alice Neel, ‘Andy Warhol’(1970)
한 해가 저물 때마다 ‘아니 벌써’ 덜컥 조급함을 느끼는 내게 겨울은 진실의 시간이다. 봄이면 삐죽 솟은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 풍성한 숱을 자랑하고, 휘황찬란한 단풍을 뽐내다, 영하로 떨어지면 모든 것들을 떨어뜨리고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는 나무들. 그 광경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자, 초라한 내 모습과 마주할 시간이야.” 휘트니미술관에서 앨리스 닐이 그린 ‘앤디 워홀’의 초상을 봤다. 뉴욕 상류층이 초상화를 그리고 싶을 때 워홀에게 달려갔다면, 다운타우너들은 닐을 찾아갔다고 한다. 워홀의 팬시한 초상 대신 닐은 약점을 끄집어내는 듯, 비뚤어진 형태와 과감한 선을 택했다. 그런 닐 앞에 있는 워홀이라니.
선글라스와 은빛 가발의 ‘페르소나’를 벗은 그림 속의 워홀은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다. 1968년 발레리 솔라나스에게 총을 맞은 후 매일 차고 다녀야 했던 코르셋 위로 포악한 수술 자국이 선명하다. 거기에 축 처진 살결까지. 유명세를 사랑하고, 그 속에 자신을 파묻었으며, 때때로 자신을 혐오했다는 워홀이 이 그림에선 편안히 눈을 감고 있다. 나를 넘어선 무언가가 되겠다며 씨 뿌리고 물 주며 욕심도 부리고, 때론 간절했으며 때론 짜릿했던 봄·여름·가을. 그런데 겨울이 되고 보니 ‘결국 나도 그저 살덩이였구나’ 하며 모든 것을 받아들인 표정이다. 다시 겨울이 온다. 그 모든 바쁨과 화려함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나와 마주한다. 나의 코르셋과 수술 자국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다시 봄이 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눈감고 생각해 본다.
by 김민, 동아일보 문화부 미술기자
Fischli/Weiss, ‘Snowman’(2016)
2023년 6월 아트 바젤 기간, 바이앨러 파운데이션의 정원에서 ‘스노맨’을 접하고 걸음을 멈췄다. 여름볕 아래 눈사람은 이질적이면서 환했고, 포근한 겨울의 감각을 불러왔다. 찬 공기 냄새, 따뜻한 사케, 눈을 굴리는 아이들과 인상 쓰며 눈 치우는 사람들. 눈 내린 풍경 속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냉장고 안의 눈사람은 사계절 내내 형태를 유지한다. 작품은 1987년 독일 뢰머브뤄케 열병합발전소 의뢰로 제작돼, 당시엔 발전소의 잉여 에너지로 냉장고가 가동됐다. 에너지의 보호를 받아 생명을 유지한 셈이다. 이후 냉각 시스템 개량으로 2016년 뉴욕현대미술관 버전은 발전소가 아닌 4000 BTU의 컴프레서로 작동했다.
내가 마주한 바이엘러 파운데이션의 ‘스노맨’은 2020년부터 영구 설치된 작품이며 태양광으로 작동한다. 눈사람이 햇빛에 의존한다는 이 역설은 모든 생명체가 촘촘한 관계망 속에서 유지된다는 점을 은유한다. 나아가 자연과 풍경이 인간의 의도와 기술에 의해 제어되며 박제될 수 있는지 묻고, 영원과 존재의 소멸, 기후 문제도 상기시킨다. 좋은 작업이 그렇듯 이 작품 역시 무수히 많은 해석의 레이어를 제공한다. 세상의 모든 사연을 하얀색으로 덮는 환한 침묵을 찰스 부코스키는 시 ‘열반’ 에서 ‘순간의 마법’이라고 표현했다. 여름의 정원에서 본 ‘스노맨’ 또한 겨울의 고요를 품은 채 사람들에게 다채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by 김민수, 갤러리현대 디렉터
Kiki Smith, ‘Winter Twilight’(2023)
진정 따뜻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겨울이 있다. 강원도 인제 숲 한가운데, 시커먼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을 올려다보던 순간이 내겐 그랬다. 묵직하게 내려앉은 고요를 깨우는 건 이따금 발을 옮기는 소리와 이름 모를 동물들의 기척밖에 없는 시간. 별들은 밝고 어두워지기를 거듭했고, 느릿하게 부유하는 눈송이만이 시커먼 여백을 채울 뿐이었다. 키키 스미스의 ‘윈터 트와일라잇’과 마주한 건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작품을 스쳐 지나는 프리즈서울 전시장에서다. ‘하나라도 더 보자’며 분주하게 옮기는 걸음은 이 작품 앞에서 멈췄다. 어떤 그림은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문 같아서 기어코 사람의 덜미를 잡고야 만다. 포근한 질감의 종이에 인쇄된 형태와 색, 그 위로 금박이 더해진 이 그림은 살아 있는 숲이다. 희끗희끗 눈이 내려앉은 침엽수 앞으로 얽히고설킨 가지인 듯한 구조물이 화면을 가로지른다. 새들은 각자 편안한 자리에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밤을 지새고, 부엉이들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단연 빛난다. 밤하늘에 찍힌 무수한 점은 단지 별만 의미하지 않는다. 공기 중의 얼음 입자, 쌓인 눈에 반사된 달빛, 잔잔한 바람의 움직임을 기록한 흔적일 테다.
이토록 촘촘하게 구성된 장면 앞에서 자연을 향한 오랜 응시의 흔적을 읽는다. 부엉이의 눈처럼 빛나는 작가의 눈동자를. 키키 스미스는 1980년대 인간 신체와 여성, 젠더에 관한 파격적인 조각을 선보이다 1990년대에 이르러 자연과 신화로 주제를 넓혔다. 그 전환에 대해 묻자 스미스는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동생의 영향을 말한 적 있다. “동생이 아플 때 자연 다큐멘터리 시청을 좋아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의사소통 능력을 잃어갔지만 자연을 바라보는 의지는 여전했죠. ‘이게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작품을 볼 때마다 나는 그녀가 응시한 숲으로, 그리고 내가 머물렀던 겨울 밤으로 돌아간다.희고 단정한 전시장에서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도, 마감 중 모니터 앞에 앉아 그림을 볼 때도. 내겐 언제고 돌아갈 수 있는 계절이 있다. 지독하게 적막하지만 소란스럽고, 춥지만 이유 모를 온기를 품은 이상한 세계가.
by 윤정훈, 〈엘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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