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백향의 책읽어주는선생님'
이 영화의 정체성을 무어라 규정할 수 있을까. 미국 역사물로 시작했는데, 가족서사였다가, 노동자의 이야기였다가, 자연 가까이 존재하는 삶과 죽음의 이야기로 옮겨가고, 결국 인생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시간에 따라 진행되지만 사건의 순서가 아니라 심경의 변화로 전개된다.
영화가 끝나고 노래가 흘러나올때 마치 시 한편이 지나간 것 처럼 느껴졌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지나가버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국 역사를 은유한다는 쓸쓸함이기도 하겠지만, 누군가의 삶을 이야기하는 보편의 스토리로 읽었다. 그래 사는 게 그런거지 하는. 영화롭게 산 것도, 사랑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닌 외로웠던 인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했던 인생. 조엘 에저튼의 연기는 물처럼 숲처럼 영화 안에 녹아 있다.
슬픔에 잡아먹힌 것 같다는 몇 마디는 그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쓸쓸했는지 대변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클레어 역시 혼자만의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인생의 과제를 안고 산림감시원으로 왔다. 그 시대가 그랬겠구나하는 생각도 들지만, 지금도 삶이란 슬픔에 휩싸여 하루하루 사는 이들이 이야기로도 읽어야 한다. 같이 모닥불을 피워주는 인디언 친구처럼 다정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캘리 라이커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 생각이 났다. 바버러 쿠니의 그림책 『바구니 달』도 생각났다. 마차도 말도 없는 고산지대 집에서 바구니를 만들어 내다 팔던 시기였다. 나무를 베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서 보던 장면이 그림책 속에서 다시 나오니, 얼마나 힘든 비문명의 시대를 견디고 사는지 실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구니달의 시대를 관통하는 바람과 달의 정취를 놓칠 수 없다. 그런 분위기를 영화에서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문명이 찬란하기 직전의 미국이다.
그들이 일구어 낸 초기 미국의 이야기는 우주시대까지 이르는데, 이 시대를 통과해서 살아왔다. 그 안에서 개인은 당도하는 내 앞의 삶들 앞에서 그냥 살았다. 마치 루쉰의 아큐처럼. 역사의 소용돌이에 영민하게 반응하기보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마지막에 비행기 타고 하늘을 유영하는 모습은 슬픔에 잡아먹혔던 인생에 대한 작은 선물 같다. 숭고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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