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희미해지고 고립감이 깊어지는 시대, 우리는 여전히 함께일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연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마음을 데운다.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4인이 ‘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책과 영화, 음악, 사진을 모았다.
우리의 겨울이 보다 따뜻하길 바라며.
강미자 <봄밤>
몇 달 전, 혼자 한 독립영화관을 찾아가 강미자 감독의 <봄밤>을 보면서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권여선 작가가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기반으로, 이혼과 아이와의 이별 후 알코올중독에 빠진 ‘영경’과 빚을 떠안은 채 류머티즘을 앓는 ‘수환’의 사랑을 그린 영화. 12년의 서사를 밀도 있게 담아내며, 인물의 감정을 시적인 장면들로 엮어낸 이 작품을 보면서 곁을 지켜주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모든 것을 잃고, 극도의 외로움과 두려움에 침잠된 상태로 만난 이들은 서로의 상처를 애써 감추거나 보듬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상대의 고통을 가만히 응시하며 함께 아파하는 것. 하나의 인격체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힘겨운 시간을 같이 견뎌내는 일. 그 애틋하고도 처참한, 예견된 불행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를 끌어안는 두 사람의 사랑이 ‘함께’하는 아름다움을 분명히 전해주었다.피처 에디터 김선희
윤가은 <세계의 주인>
어른답게, 여성스럽게, 결혼을 해서 혹은 아직 못 해서, 몸이 아파서 혹은 건강하니까. 급기야 MBTI까지. 누군가를 규정하는 숱한 표현 사이에서 온전히 나답게 산 적이 있던가.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보지 말라며 정면으로 부딪쳐본 적이 있던가. 영화 <세계의 주인>을 보며 서글펐고, 동시에 통쾌했다. 그리고 끝내 스스로에게 조금 더 솔직해지게 되었다. 친구, 동료, 가족을 더 넓게 바라보게 되었다. “자신의 진실을 용기 내어 발견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누구도 절대 혼자가 아니며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영원히 남겨질 상처를 안고도, 자신의 모습을 지키며, 더 깊고 넓은 세계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윤가은 감독이 남긴 메시지처럼, 더 솔직하게 살아갈 힘이 생겼다. 영화 역시 기세 좋게 나아가는 중이다. 겨울 한파 속에서도 도무지 웅크리지 않을 기세로. 피처 수석 에디터 강예솔
오쿠야마 요시유키 <엣 더 벤치>
철거되기 직전의 공원에 낡은 벤치 하나가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이마저도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지만, 벤치에 대한 저마다의 추억과 사연을 간직한 이들이 이곳을 찾아 얼마간 대화를 나누다 이내 자리를 뜬다. 오랜만에 재회한 소꿉친구, 마트에서 사온 초밥을 까먹다 말고 이별을 말하는 연인, 노숙자가 된 언니를 찾으러 온 동생, 벤치 철거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관청 직원들. 서로 관계없는 인물과 상황이지만, 이들의 대화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마치 같은 벤치에 앉아 있는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정에 가까이 가닿게 된다. 영화 내내 벤치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서로 다른 삶이 잠시 맞닿는 작은 연극 무대가 된다. 해 질 무렵의 나른한 빛 아래 롱테이크로 담아낸 인물들의 표정에는 대화 사이사이를 스치는 머뭇거림과 망설임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극적인 사건 없이도 벤치 위에서 서로의 진심이 오갈 때 잠시 피어오르는 미세한 온기가 이 계절의 마음을 데워준다. 피처 에디터 안유진
고레에다 히로카즈 <환상의 빛>
소박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하던 ‘유미코’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사별한다. 몇 년 후, 그는 재혼하여 새 가족이 사는 시골의 섬으로 향한다. <환상의 빛>은 돌연히 한 사람이 떠나간 후, 남겨진 사람의 시간을 비춘다. 그럼에도 살아지는 하루, 불현듯 밀려드는 질문과 고통까지 멀찍이 떨어져서 담아낸다. 유미코가 새 남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도, 처음으로 울음을 토해낼 때도, 그의 표정은 끝내 선명히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섬세함에 큰 위로를 받았다. 편하게 웃어도 되고, 때로는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남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유미코에게 새 남편은 말한다. “아버지가 전에 배를 탔는데, 홀로 바다 위에 있으면, 저편에 예쁜 빛이 보인댔어. 빛이 깜빡거리면서 당신을 끌어당겼다는 거야. 누구나 그런 게 있지 않을까?” 누구나 상처 하나쯤은 품고 산다고, 자신의 상처만으로도 버거울 테니 나까지 보태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감정을 누르기에 급급했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거센 바람과 파도가 치던 유미코의 집 앞 바다에 마침내 따스한 빛이 드리운다. 함께 봄을 느끼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용기를 가져본다. 함께 봄을 맞는 이들을 보며 용기를 가져본다. 너와 나의 벽을 허물고 슬픔을 나눌 때, 가까워질 행복을 기대하며. 피처 어시스턴트 에디터 오유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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