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화업계 진찰은 끝났다.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던 산업 사이클이 더 이상 돌지 않는다는 진단이 내려진 지 오래다. 이에 정부는 석화기업에 처방전을 내렸다. NCC 설비 감축을 통해 원가경쟁력을 잃은 범용 제품 생산 축소를 강하게 권고했다. 체질 개선에 앞서 체중을 먼저 줄이라는 것. 생존을 위한 극약처방이다. 사업재편안 제출 기한은 연말까지다. 제출 한 달여를 앞둔 지금, 각 석유화학사는 극적인 다이어트를 준비하고 있다. <편집자주>편집자주>
【투데이신문 심희수 기자】 전남 여수 석화단지(이하 여수 산단)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국내 3대 석화단지(여수·대산·울산) 중 가장 많은 NCC 설비 감축을 떠안았지만, 정작 사업재편안 제출 기한인 연말을 한 달여 앞두고도 구체적인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감축 목표로 제시한 350만t(톤) 중 100만톤이 여수 산단의 몫이다. 반면 금융 지원 방안은 아직이다.
1일 석화업계에 따르면 여수 산단에 공장을 두고 있는 LG화학, GS칼텍스, 롯데케미칼, 여천NCC 등의 사업재편안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앞서 LG화학이 여수 NCC 공장을 GS칼텍스에 매각하고 양사가 합작사를 설립해 통합 운영하는 방안이 거론됐다. 양사는 최근 컨설팅사 베인앤컴퍼니를 선정하고 설비 통폐합, 공정 최적화에 따른 비용 절감 등 통합 시너지 산정 작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LG화학은 여수에서만 연간 208만톤의 에틸렌을 생산하며, GS칼텍스의 생산량은 90만톤 수준이다. 정유사와 화학사 간 ‘수직 통합’ 형태로, 통합이 실현되면 원가 경쟁력 확보에 도움이 될 것으로 평가된다.
LG화학 관계자는 “대산 산단에서 1호 자구책이 나온 만큼 기업 간 조율을 거쳐 연내 재편안이 나올 수 있도록 속도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GS칼텍스는 보다 신중한 입장이다. GS칼텍스 관계자는 “정부 권고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일정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롯데케미칼과 여천NCC도 주주사 간 협의를 진행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재편 방향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여수 산단의 사업재편이 지지부진한 가장 큰 이유는 정부의 금융 지원 방안이 구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비 감축에는 수천억원대 비용이 들지만, 업계는 정부가 ‘선 자구안 마련, 후 패키지 지원’ 원칙만 되풀이할 뿐 구체적인 지원방안은 요원하다고 평가한다.
한국석유화학협회 관계자는 “기업들의 부채 비율은 상당한 편인데 영업이익이 나지 않고 장기 전망도 좋지 않아 차입금 상환 이슈가 있다”며 “신용등급 하락 우려가 연일 제기되는 만큼 금융 지원이 가장 시급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정부 지원책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의 선택은 어려운 일이다. 관계자는 “기업 내부 합의와 지원책 구체화가 필요한데,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시간이 당연히 소요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런 가운데 산업통상부 김정관 장관이 지난달 26일 여수 산단을 직접 방문해 사업재편안 제출을 강력히 촉구했다. 김 장관은 이날 열린 ‘여수 석유화학기업 사업재편 간담회(이하 여수 간담회)’에서 “대산 산단이 사업재편의 포문을 열었다면 여수는 사업재편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며 “사업재편 계획서 제출 기한을 연장할 계획은 없다”고 못 박았다. 특히 “기한을 맞추지 못한 기업들은 정부 지원에서 제외될 것”이라며 “향후 대내외 위기에 대해 각자도생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지난달 21일 ‘석유화학산업의 경쟁력 강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를 통과하며 정부 지원의 법적 기반은 마련됐다.
특별법은 정부가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실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산업 구조조정 촉진을 위해 공정거래법 등에 대한 특례를 담았다. 사업재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용불안과 근로자 보호, 지역경제 충격 최소화를 위한 지원 근거도 포함됐다. 더욱이 세제지원과 공정거래법 특례는 이미 사업재편을 추진하고 있는 석유화학기업들도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2025년 1월 1일부터 소급 적용된다.
협회 관계자는 “업계 의견이 특별법에 상당 부분 반영돼 지원할 수 있는 법제적 틀을 마련했다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면서도 “다만 기업들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된 지원책은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산 산단에서 사업재편안을 제출하면서 정부가 세제 지원 등을 약속했는데, 이런 부분들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될 때 여수와 울산에도 영향을 많이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수 간담회에서 참석 기업들은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 부담, 석유화학 특별법 조속 시행, 미국 비자 발급 지원 등을 건의했다. 김 장관은 “전기요금 부담은 산업 경쟁력 관점에서 조정 협의 중이고, 특별법은 내년 1분기 시행을 목표로 준비 중”이라고 답했다.
대산 산단에서 사업재편안이 확정되기 전까지 조심스럽게 진행됐던 것처럼 여수 산단과 울산 산단도 비슷한 양상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LG화학 관계자는 “기업 간 사업재편을 위한 조율 중에 있으나 여수 산단에 위치한 석화기업들의 ‘뿌리’가 다르다 보니 협의에 시간이 지체되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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