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영화상은 엄정하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막상 시상식이 끝나고 나면 예상을 뒤집는 선택을 남기곤 합니다. 그 이변의 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청룡이라는 브랜드가 만들어졌는데요. 2010년 이후 청룡을 뒤흔든 의외의 순간을 돌아봅니다.
천우희, 독립영화가 연 주연상의 문
2014년 제35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천우희의 이름이 불렸을 때, 객석도, 시청자도 수상자 보인도 놀랐습니다. 후보 리스트를 보면 짐작되는데요. 손예진(〈공범〉), 김희애(〈우아한 거짓말〉), 전도연(〈집으로 가는 길〉), 심은경(〈수상한 그녀〉)이라는, 그해 극장가를 쓸어 담은 상업영화의 얼굴들이 모두 포진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우희가 연기한 〈한공주〉는 당시만 해도 극장에서 보기 힘든 독립영화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던 시절의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3억 원 안팎의 제작비로 시작해 입소문만으로 20만 관객을 넘기며 독립영화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높은 관심을 받았죠. 로테르담, 마라케시 등 주요 영화제에서 잇따라 수상하며 작품성을 먼저 증명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청룡의 무대는 또 다른 차원이죠. 전통적으로 상업영화의 왕좌를 확인하는 자리고, 여우주연상은 특히 그해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를 상징하니까요. 이런 흐름 속에서 저예산 독립영화의 주연 배우가 상업영화 톱스타들을 제치고 트로피를 들어 올린 건, 파란이었습니다. 당시 기사 제목에도 “신예의 파란”이라는 표현이 반복됐죠. 천우희는 수상소감에서 “작은 영화이고, 유명하지 않은 배우인데 이렇게 큰 상을 주셔서 감사하다”며 울먹였고, 이 상이 “포기하지 말라는 뜻 같다”고 말했습니다. 돌이켜보면, 2014년 천우희의 수상은 이후 이어질 ‘독립영화계의 반격’을 예고하는 신호였습니다. 청룡이 흥행보다 연기와 작품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증명했죠.
이정현, 2억짜리 블랙코미디로 여우주연상
2015년 청룡은 또 한 번 모두의 예상을 비켜갔습니다. 제36회 여우주연상 후보 라인업은 전지현(〈암살〉), 김혜수(〈차이나타운〉), 전도연(〈무뢰한〉), 한효주(〈뷰티 인사이드〉), 이정현(〈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이었는데요. 누가 상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쟁쟁한 후보였지만, 많은 이들이 1,200만 관객을 동원한 〈암살〉의 전지현, 혹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김혜수의 수상을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청룡이 선택한 이름은 이정현이었습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총 제작비 2억 원 규모의 저예산 독립영화였고, 이정현은 사실상 노개런티로 참여했다는 뒷이야기까지 알려지며 화제를 모았는데요. ‘생계 밀착형 코믹 잔혹극’이라는 기묘한 장르를 내세운 영화는, 빚과 사기, 부동산, 병원비에 짓눌린 한 여성이 점점 광기 어린 선택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흥행 스코어만 보면 4만 명대 관객이라는 숫자는 대작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대상 수상으로 먼저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무엇보다 영화 전체를 홀로 이끌어가는 이정현의 연기가 압도적이라는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1996년 〈꽃잎〉으로 충격적인 데뷔를 남긴 뒤 한동안 대표작을 찾지 못하던 이정현에게, 여우주연상은 배우 인생의 2막을 여는 사건이었습니다.
〈내부자들〉, 정치 스릴러가 품은 최우수작품상
2016년 제37회 청룡영화상은 후보 발표 단계부터 역대급 라인업이었는데요. 〈곡성〉, 〈부산행〉, 〈아가씨〉, 〈밀정〉, 〈동주〉 등 작품성과 흥행을 모두 잡은 작품들이 한 해에 몰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트로피를 가져간 것은 권력의 카르텔을 다룬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내부자들〉이었습니다. 정치권, 언론, 재벌, 조직폭력배가 한데 얽힌 대한민국의 ‘내부’ 권력을 파헤치는 영화는, 원작 만화의 거친 세계관을 유지한 채 노골적인 풍자와 폭력을 쏟아냅니다. 개봉 당시 〈내부자들〉은 19금 등급의 한계를 뚫고 7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역대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흥행 상위권에 올랐습니다. 이후 확장판인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까지 더하면 900만 명에 육박했쬬. 거의 천만 영화인 셈인데요. 박근혜 정권 말기, 권력과 언론, 자본의 유착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이 극에 달해 있던 시점에서, 그 구조를 정면으로 겨냥한 영화가 최고 작품상을 가져간 것입니다. 통상 청룡의 최우수작품상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영화에게 돌아간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그 기준으로 보면 천만 관객을 넘긴 좀비 블록버스터 〈부산행〉이나, 미학적 완성도가 뛰어난 〈아가씨〉의 수상이 더 교과서적인 선택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청룡은 시대의 공기를 가장 정면으로 끌어안은 영화에 손을 들어줬습니다.
현빈과 손예진, 첫 부부 동반 주연상
2025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배우 '현빈'/ 인스타그램 @@vast.ent
지난 19일, 제46회 청룡영화상은 새로운 역사 한 줄을 추가했습니다. 현빈(〈하얼빈〉)과 손예진(〈어쩔수가없다〉) 부부가 나란히 남녀주연상을 수상하며, 46년 역사상 최초로 현실 부부의 동반 주연상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운 것입니다. 두 사람은 청정원 인기스타상까지 더해 나란히 2관왕에 올랐습니다. 부부가 동시에 상을 받아서, 영화보다 영화 같다는 얘기도 나왔는데요. 하지만 곧바로 ‘화제성을 노린 캐스팅 아니냐’는 비판이 따라붙었습니다. 일부 기사에서는, 연기력에 대한 폄훼가 아니라, 남우주연상 부문에서 이병헌·박정민의 연기와 작품의 무게감을 감안했을 때 현빈의 수상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꼬집었습니다. 손예진이 맡은 역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고, 오히려 이혜영이 이끈 〈파과〉나 송혜교의 재발견을 더 높게 평가한 시선이 적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여기에 〈얼굴〉이 10개 부문 후보에 오르고도 단 하나의 트로피도 가져가지 못한 채 돌아간 점, 야당 정치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야당〉이 단 한 부문에도 노미네이트되지 못한 점까지 더해지면서, 후보 선정부터 결과까지, 청룡도 ‘어쩔수가없다’는 말로 넘기려는 것 아니냐는 뼈 있는 사설도 등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빈·손예진 부부의 동반 수상이 청룡사에 한 줄 박힌 것은 사실입니다. 논쟁과 별개로 2025년 한국 영화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수상은 “청룡은 여전히 화제성과 예술성, 그리고 ‘이야기거리’를 동시에 고민하는 시상식”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Copyright ⓒ 에스콰이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