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을 숭배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겁한 욕망에 대하여
뉴스를 틀면 그들이 나온다. 뻔뻔한 얼굴로 거짓말을 하고, 약자를 짓밟은 전력이 드러나도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며,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도구로 쓴 흔적이 역력한 사람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대중은 그들에게 돌을 던지기보다 환호한다.
- - “그래도 능력은 있잖아.”
- - “저 정도 깡은 있어야 성공하지.”
- - “매력 있네. 카리스마 있어.”
우리는 학교에서 정직과 배려가 미덕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교문을 나서는 순간 마주하는 현실은 정반대다. 회사에서는 목소리 크고 남의 공을 가로채는 상사가 승진하고, 정치판에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선동가가 표를 얻으며, 연애 시장에서는 나쁜 남자와 나쁜 여자가 인기를 독차지한다.
심리학자들은 인구의 약 15% 정도가 임상적인 수준의 나르시시즘이나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이른바 어둠의 성격(Dark Triad)을 가진 이들이라고 추산한다. 15%.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지하철 한 칸에 적어도 대여섯 명은 타고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 소수의 포식자들이 우리 사회의 가장 높은 곳, 가장 빛나는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머지 85%의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착취당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동경하고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준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왜 우리는 우리를 잡아먹을 괴물에게 스스로 왕관을 씌워주는 것일까. 이 기이한 현상의 이면에는 나르시시스트의 교묘한 생존 전략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에 숨겨진 비겁하고 게으른 본능이 똬리를 틀고 있다.
자신감과 능력의 치명적인 착시 현상
우리의 뇌는 원시 시대의 초원에 머물러 있다. 그 시절에는 목소리가 크고, 망설임 없이 행동하며, 가슴을 활짝 펴고 걷는 사람이 사냥을 잘하고 무리를 지킬 확률이 높았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감’을 ‘능력’과 동일시하도록 진화했다.
나르시시스트는 이 진화의 버그를 가장 잘 악용하는 해커들이다. 그들은 능력이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잘못해도 잘한 척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그들의 확신에 찬 눈빛과 단호한 말투를 보면, 보통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저렇게까지 확신하는 걸 보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겠지.’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자신감과 실제 능력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오히려 역의 상관관계를 보이기도 한다. 진짜 실력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겸손하고 신중하지만, 빈 껍데기인 나르시시스트는 수치심을 모르기에 뻔뻔할 수 있다.
우리는 ‘당신의 공감 능력은 약점이 아니라 가장 큰 무기다‘ 에서 다루었듯, 타인의 감정을 읽고 배려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뻔뻔함을 상상하지 못한다.
‘설마 거짓말이겠어?’라는 우리의 선한 추측이, 그들에게는 가장 뚫기 쉬운 방패가 된다. 우리는 그들의 자신감을 리더십으로 착각하고, 그들의 오만함을 카리스마로 오해하며 그들을 리더의 자리에 앉힌다. 그리고 그 대가는 처참하다.
자본주의가 사랑한 괴물들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은 나르시시스트를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놀이터와 같다. 경쟁, 효율, 자기 PR, 무한 성장. 이 시스템이 요구하는 덕목들은 나르시시스트의 기질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공감 능력이 결여된 것은 기업 경영에서 ‘냉철한 결단력’으로 포장된다. 타인을 착취하는 성향은 ‘인적 자원 관리 능력’으로 둔갑한다. 끊임없는 인정 욕구는 ‘성취 지향적 태도’로 칭송받는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은 남에게 폐를 끼칠까 봐 주저할 때, 나르시시스트는 동료를 밟고 올라가서라도 성과를 낸다(혹은 냈다고 떠벌린다). 시스템은 과정의 도덕성보다 결과의 숫자를 사랑하기에, 그들에게 보너스를 주고 승진을 시킨다.
그들이 조직의 상층부를 장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조직은 서서히 병들어간다. 유능한 직원들은 가스라이팅을 견디다 못해 떠나고, 아첨꾼들만 남아 그들의 비위를 맞춘다.
결국 조직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썩어 문드러진, 나르시시스트 자신의 내면과 똑같은 꼴이 된다. 하지만 사회는 그 붕괴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들의 화려한 쇼에 속아 박수를 보낸다.
대리 만족, 우리의 비겁한 욕망
우리가 나르시시스트에게 관대한 가장 불편한 진실은, 우리가 그들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수많은 욕망을 억누르고 산다.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싫어도 웃고, 규칙을 지키며 눈치를 본다. 우리는 그것을 문명인의 예의라고 부르지만, 내면 깊은 곳에는 ‘나도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억압된 욕망이 들끓고 있다.
그런데 눈앞에 누군가가 나타나 그 금기를 깬다. 그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리를 지르고, 갖고 싶은 것을 뺏고, 자기 잘난 맛에 산다.
우리는 그 무례함을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이한 쾌감을 느낀다. 내가 못 하는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그에게서,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다.
영화 속 악당이나 현실의 독재자가 묘한 인기를 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나의 억눌린 자아(Shadow)를 그들에게 투사한다.
그들의 뻔뻔함은 우리의 소심함을 위로하는 마약이 된다. 우리는 그 괴물에게 돌을 던지는 대신, 그 괴물의 힘에 기생하여 나도 그 힘을 나눠 갖고 싶다는 은밀한 욕망을 품는다.
구원자 환상에 기생하는 숙주들
나르시시스트가 권력을 잡는 과정은 종교의 탄생 과정과 유사하다. 그들은 불안해하는 대중에게 “나만 믿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라고 선언한다. 복잡한 세상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이 단순하고 강력한 메시지는 복음처럼 들린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귀찮아한다. 책임을 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누군가 강력한 존재가 나타나 나 대신 결정을 내려주고, 나 대신 싸워주고, 나를 낙원으로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구원자 환상’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이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 그들은 기꺼이 우리의 구원자를 자처한다. 물론 그들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당장의 불안을 잠재워줄 강력한 아버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관대한 이유는, 그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나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의 무게를 견디기보다, 차라리 달콤한 독재자의 노예가 되기를 선택한다.
그가 가끔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에 감사하며, 그가 휘두르는 채찍질을 ‘우리를 위한 훈육’이라고 합리화한다.
15%를 격리하는 85%의 연대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들의 먹잇감이 되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인류의 역사는 이 15%의 포식자들과 나머지 85%의 협력자들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이었다. 때로는 포식자가 이겨 제국을 건설했지만, 결국에는 다수의 연대가 그들을 무너뜨렸다.
나르시시스트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나르시시스트를 섣불리 용서하지 마라’ 에서 말했듯, 악에게 베푸는 관용은 선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화려한 깃털 뒤에 숨겨진 빈약한 몸통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들의 자신감이 실력이 아님을 꿰뚫어 보는 혜안(慧眼)을 길러야 한다.
그들의 무례함을 솔직함으로 포장해 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제공하는 값싼 사이다에 취해 우리의 존엄을 팔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내 안의 욕망을 점검해야 한다. 나는 왜 저 오만한 자에게 끌리는가. 나는 왜 나를 대신해 줄 강한 힘을 갈구하는가. 내 안의 결핍이 해결되지 않는 한, 하나의 나르시시스트가 사라지면 또 다른 나르시시스트가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용인했기에 존재한다. 우리가 박수 치기를 멈추고, 무대 조명을 끄고, 그들을 차가운 현실의 바닥으로 끌어내릴 때, 그들은 비로소 힘을 잃는다. 괴물은 숭배자가 사라지면 굶어 죽는다. 그 밥줄을 끊는 것은, 바로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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