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2층 전시실로 들어서는 순간, 조용하던 공기가 한순간에 가라앉는다. 단순한 기념관의 정적이 아니라, 오래된 전장의 숨결이 공간 전체를 회색빛으로 덮는 느낌에 가깝다.
22일 기자가 한 걸음 더 들어가자 수백 명의 얼굴이 걸린 벽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렇게 바랜 사진 아래 짤막한 기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전투 중 전사." 이름도 계급도 잊힌 이들은 더 말이 없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강한 서술이었다.
전쟁기념관이 이렇게 압도적인 것은, 그 어떤 전시물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웅’이라는 수사가 없어도, 사진 속 청년들의 표정은 스스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1950년 6월 서울을 잃던 순간, 후퇴와 재탈환을 반복하던 절망의 시절, 한강 철교 위에 남은 장병들의 마지막 발걸음이 고스란히 벽면 속에 녹아 있다.
가장 많은 관람객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다부동 전투다. 실탄을 맞은 철모, 전투복 등 탄흔이 수십 개 박힌 탄약 상자가 그대로 전시돼 있었다. 구경용 모형이 아니라, 실제 국군 병사들이 몸으로 막아낸 유물들이다.
작전 지도에는 ‘고지 8회 탈환’이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8회 탈환”이라는 숫자 앞에서 관람객들은 대부분 말을 잃는다. 죽어 나가는 병사가 생겨도, 무기가 모자라도, 체력이 바닥나도, 고지는 도로 빼앗기면 안 됐기 때문에 그들은 여덟 번이나 올라갔다.
장진호 전투 구역에서는 공기가 더 차갑게 가라앉는다. 영하 30도, 얼어붙은 호수, 평생 돌아가지 못한 수백여 명의 동료들, 사진 속 얼굴들은 실제 온도보다 더 싸늘해 보였다. “전선 철수 명령 불가”라는 작전문 한 장이 유리관 안에 놓여 있었는데, 종이 한 장이 어떻게 사람 목숨을 결정했는지, 그 무게가 그대로 전해졌다.
월남전 분야로 이동하자 전시의 색감이 바뀌었다. 정글 위장색과 녹색 배낭, 마치 방금 숲에서 돌아온 듯한 모습의 군장(軍裝)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전우를 먼저 부축하다 전사’라는 짧은 기록이었다. 전쟁기념관은 영웅 만들기를 하지 않는다. 짧은 한 줄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한 줄에 인간의 본능, 공포, 선택, 희생을 이겨낸 명예, 헌신, 용기가 모두 들어 있다.
국군이 해외에서 처음으로 실전 경험을 쌓던 순간의 긴박함도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무전기 옆에는 “작전 불가, 통신 두절”이라는 당시 장병의 메모가 남아 있었다. 종이 한 장, 흙 묻은 글씨, 붉게 번진 잉크 등 그 작은 조각들이야말로 전시물 속에서 가장 강한 메시지를 던졌다.
3층 전시관에 마련된 ‘북한 도발사’ 구역은 분위기를 다시 바꿨다. 여기에는 ‘끝난 전쟁’이 없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울릉도 무장공비 침투,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까지 대한민국이 직접 겪어온 살아 있는 전투 기록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천안함에서 건져 올린 울분과 연평해전의 탄흔 그리고 북핵 도발까지 잊혀진 위험과 위협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는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진열장 앞에서 어린아이조차 조용히 서 있었다. 전쟁기념관이 가진 공간의 힘은, 이 무언의 긴장감에서 비롯된다.
마지막 구역은 이라크·아프간·남수단·소말리아 등 세계 곳곳에서 펼쳐진 국군 파병 활동이 담겨 있었다. 특히 청해부대가 해적에게 납치된 ‘삼호주얼리호’를 구출하는 장면은 관람객들의 시선을 오래 붙잡았다.
이 작전은 세계 해군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성공 사례로 기록된다. 해적에 둘러싸인 선박에서 뛰쳐나오는 한국 해군의 영상은 ‘우리 군이 어느 수준까지 왔는가’를 단번에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전시관을 모두 둘러보고 출구로 향하는 길, 벽면에 적힌 문구가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다.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
그 문구 앞에서 많은 관람객이 멈춰 섰다. 6.25(한국전쟁)·베트남전·대남도발·평화유지활동까지 모든 장면이 한 줄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전쟁기념관은 과거를 보여주는 장소가 아니다.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 묻는 공간이다.
“이들은 왜 싸웠는가?” 그리고 더 냉정한 질문 하나가 남는다.
“우리는 지금도 싸울 준비가 돼있는가?”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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