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MIA 작가] 최근에 모 학교로부터 강의 제안을 받았다. 그림책을 활용한 수업 동아리를 운영하는 선생님이었다. 그는 그림책을 교육 수단 이상의 매체로 바라볼 수 있도록, ‘예술 매체로서 그림책을 보는 방법’을 강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제안은 꽤 구체적이어서 호기심이 갔다. 학생들과 그림책으로 수업이나 활동을 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이 장르에 관해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선생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했다.
올해 새로 오픈한 강의가 ‘그림책을 보는 네 가지 기준’이었던 만큼 요청받은 주제는 내게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니었다. 나는 이 강의를 통해 나름대로 그림책을 바라보는 다채로운 면을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예술 매체로서 그림책’이라는 표현을 듣는 순간 내 안의 가려진 관심사가 명확히 드러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관심을 두고 해오던 강의가 결국 그림책을 예술 매체로 바라보기 위한 시도였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기분이 들었다.
차이점이라면 수강 대상이었다. 그동안 나는 의도치 않게, 그림책 읽기 수업의 대상을 그림책 애호가나 작가 지망생처럼 이미 그림책을 예술의 한 장르로 여기는 사람들로 한정해 왔던 것 같다. 일반 대중들이 그림책을 보는 시각이야 뻔하고 따라서 그 이상의 시도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은연중에 포기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전제를 세우는 일에 에너지를 쏟을 바에야 전제에 합의한 사람들과만 얘기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가벼운 반성 후에 강의를 진행했다. 원래 2시간씩 4회차로 진행하던 강의를 1회차 2시간으로 압축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강의 목적과 방향, 내용은 거의 같았다. 그런데 아주 매끄럽지는 못했다. 정확히는, 강의를 듣는 선생님들의 반응이 즉각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의는 현장성이 짙어서 강의자가 똑같은 내용을 말해도 공간과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내 직관은 맞았다. 강의를 요청하신 선생님께서 ‘유익했지만 어려웠다’라는 피드백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동안 작가 지망생이나 그림책 애호가와 함께 수업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결과라고 느꼈다.
이 일을 계기로 다시 한번 내가 줄곧 가졌던 질문을 스스로 답하는 시간에 이르렀다. 훨씬 분명해지고 밝아졌다. 지금껏 그림책을 보는 기준을 나름대로 세워 제안하려고 했던 이유는, 그림책은 그 자체로 예술 매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제의식을 살짝 비틀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처음의 질문이 ‘그림책을 예술 매체로 본다는 건 무엇이며, 어떻게 할 수 있는가?’였다면, 이번에는 ‘왜 사람들은 그림책을 예술 장르로 보지 못하는가?’로 바뀐 것이다.
원인이 무엇인지 여러 의견과 추측을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그림책이 어떤 위치와 맥락에 놓여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방법이다. 여러 배경이나 상황을 고려할 수 있지만 특별히 고려하지 않더라도 내가 진단한 문제는 명백히 하나다. 그건 ‘독자가 그림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그것이 중요한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그림을 봐야 한다는 생각조차 잘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 나열한 문장은 모두 같은 의미이기에 문제가 하나라는 결론은 같다.
그러니 해답 또한 하나다. ‘그림을 보면 된다.’ 사례나 논증 과정이 생략되어 있어서 다소 극단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만큼 순수한 답일 수도 있다. 대신 앞으로 이 해답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몇 개의 관문을 차근차근 짚어보려 한다. 첫 번째는 책이라는 물성을 중심으로, 두 번째는 글과 그림의 관계를 중심으로, 세 번째는 글 없는 그림책을 중심으로, 네 번째는 작가주의 그림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동시에 그림책을 보는 기준들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목적은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건 바로 그림책을 주제 찾기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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