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조지 R.R. 마틴은 존경받는 판타지, SF 소설의 대부로 수많은 작품들, 그중에서도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다. 대표작 ‘얼음과 불의 노래’는 HBO에서 제작한 판타지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원작으로 시즌 8까지 제작되며 HBO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 작가의 작품이 최초로 영화화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팬덤은 이미 거대한 상상과 기대 속에 들어선다. 폴 W.S. 앤더슨 감독의 신작 '인 더 로스트 랜드'는 이러한 기대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마틴이 원작자로 이름을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각본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원작자가 관여하지 못해 발생하는 정서적 괴리나 세계관의 변질을 최소화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감독이 밝힌 바에 따르면 마틴은 시나리오 초안에서 중요한 반전과 크리처의 형태, 그리고 세계를 확장할 출발점을 제시하며 영화적 구현을 넓은 지평으로 끌어올렸다.
7년에 걸친 개발 기간 동안 이루어진 협업은 기술적 조언을 넘어 글과 영상 사이의 깊은 번역 작업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마틴의 서사가 가진 밀도는 단편이라는 형식 속에서도 묵직하고 넓다. 이를 큰 스크린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소설의 숨겨진 층위를 해석하고 확장하는 창작적 대화가 필수적이다. 감독이 “그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힌 순간은 바로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신뢰의 증표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원작자와 감독이 긴밀히 호흡했다는 점은 영화의 세계관 설계에서 특히 돋보인다. '인 더 로스트 랜드'는 디스토피아, 판타지, SF가 혼합된 장르적 혼성체인데, 이는 마틴의 문학적 DNA와 앤더슨 감독의 시각적 스타일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지점이다. 어둠, 권력, 욕망, 신화적 구조 등 마틴 특유의 선택의 서사가 디스토피아적 미장센을 만나면서 독특한 장르적 밀도를 형성한다.
작품의 중심에는 마녀 앨리스가 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줄 힘을 가졌지만 어떤 요청도 거절하지 못하는 숙명을 지닌 존재라는 설정은, 마틴이 즐겨 탐구해온 비극적 아이러니를 구현한다. 여왕이 요구하는 '인간 이상의 힘'이라는 목표는 결국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파국적 선택을 낳는가에 대한 질문을 암묵적으로 던진다.
그 여정에 동행하는 인물이 바로 사냥꾼 보이스다. 그가 로스트 랜드의 유일한 안내자라는 설정은 조력자 이상의 역할을 암시한다. 보이스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이미 알고 있는 자, 그리고 그 길에 왜 다시 들어가야 하는지를 스스로도 완벽히 설명할 수 없는 자다. 이 모호함은 캐릭터의 깊이를 만든다.
보이스를 연기하는 데이브 바티스타는 이 영화에서 매력적인 대비를 만들어낸다. WWE 슈퍼스타에서 시작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드랙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소프 벤조, '듄'의 글로수 라반까지 이어진 그의 필모그래피는 이미 액션 이미지에 고착되기를 거부해 왔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신체성 너머의 감정을 표현하며 연기 폭을 또 한 번 확장한다.
바티스타의 존재감은 로스트 랜드라는 공간의 잔혹함과 동시에 인간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열쇠처럼 작동한다. 그의 캐릭터는 강인함과 상처가 공존하는 층위를 갖고 있으며, 이 복합성이 영화 전체의 감정선을 이끌어간다. 이는 액션의 중심을 넘어 서사적 중심이라는 의미다.
밀라 요보비치는 앤더슨 감독과의 오랜 협업을 통해 구축해 온 특유의 강인함과 신비로움을 다시 한번 스크린에 증명한다. '마녀'라는 존재가 가진 상징성과 앨리스라는 캐릭터의 숙명을 결합하며 마틴식 여성 캐릭터의 비극성과 힘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요보비치의 카리스마는 작품의 신화적 무게를 지탱하는 축 가운데 하나다.
종교적 집단의 추적이라는 서브플롯 역시 마틴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요소다. 믿음의 폭력성과 이단에 대한 두려움은 세계관의 배경적 긴장감을 높이고, 권력의 형태가 다양한 층위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판타지적 장식이 아니라 세계관의 논리를 탄탄히 만드는 장치다.
'인 더 로스트 랜드'는 최근 헐리우드 시장에서 보기 드문 작품이다. 기존 프랜차이즈나 리메이크에 의존하지 않고, 원작자의 참여를 기반으로 새 세계를 열어젖히는 방식의 오리지널리티가 살아 있다. 세계관 자체가 스핀오프나 시리즈를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단편에서 출발한 설정은 넓은 확장 가능성을 품고 있다.
디스토피아 장르가 흔히 빠지기 쉬운 설정 중심주의를 피하고, 캐릭터의 선택과 감정적 갈등을 중심에 둔 구조는 이 작품을 차별화하는 요소다. 세계가 거대해질수록 인물은 도구화되기 마련이지만, 마틴의 서사와 앤더슨 감독의 연출은 그 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오는 26일 개봉을 앞둔 지금, 팬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마틴의 세계가 스크린에 어떻게 구현되었는가'다. 원작 충실도를 말하는게 아니다.
'인 더 로스트 랜드'는 장르적 스펙터클이자, 한 작가의 내면 세계가 스크린이라는 매체를 만났을 때 발생하는 흔치 않은 충돌과 조화를 담고 있다. 마틴의 상상력, 앤더슨 감독의 스타일, 그리고 배우들의 존재감이 결합한 영화는 디스토피아 판타지 장르에 새로운 결을 제시할 가능성을 충분히 품고 있다.
결국 작품은 판타지 액션 블록버스터를 넘어, 인간의 욕망과 선택에 대한 신비적 무게를 품고 있다. 로스트 랜드라는 공간은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어둠의 거울처럼 작동하며, 그 안에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운명적 선택이 더욱 선명해진다. 관객이 스크린 앞에 마주하게 될 것은 바로 그 선택들이 만들어내는 세계의 진폭이며, 작품은 그 경험을 통해 새로운 판타지적 감각을 일깨우는 여정을 제시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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