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김기주 기자] 제주에 가을이 오면 누구보다 바빠지는 이가 있다. 귤밭과 양봉장, 그리고 올해는 키위밭까지 오가며 하루를 쪼개 쓰는 고말선(62) 씨. 숨 돌릴 틈 없는 일정 속에서도 그녀가 미소를 잃지 않는 이유는 곁을 든든히 지켜주는 남편 노창래(62) 씨가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2년 전 농업인 교육장에서였다. 사별 후 아픈 어머니를 돌보던 말선 씨와, 이혼 뒤 빈손으로 제주에 내려와 새로운 삶을 꿈꾸던 창래 씨. 서로의 사정을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던 시절,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온기가 싹텄다. 그러던 어느 날, 창래 씨가 가볍지 않은 짐을 멘 채 말선 씨 집 앞에 섰다. 갈 곳이 마땅치 않던 그 절박함 속에서, 말선 씨는 오히려 전 남편이 떠밀어 보낸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녀는 그를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지금의 두 사람은 제주 곳곳을 함께 누비는 ‘찐’ 부부다. 가을이 오면 제일 먼저 찾는 곳도 함께다. 바로 말선 씨의 전 남편이 잠든 영탑. 초를 밝히고 절을 올리는 자리에서 창래 씨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지훈이 아버지, 올해도 가족들 잘 부탁드립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존중과 마음이 깃든 순간이다.
오늘 말선 씨는 농사복 대신 정갈한 한복을 입었다. 절에서 열린 천도재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위패에는 먼저 떠난 전 남편과 친정어머니의 이름이 적혀 있다. 19살에 제주를 떠나 구미에서 공장 일을 하던 시절 만나 함께 두 아들을 낳고 평범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 남편의 사업 실패와 20억 원대 빚이 닥쳤고, 가족은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치킨집을 운영하며 새로운 희망을 꿈꾸던 그때, 남편은 잠든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믿고 싶지 않은 이별이었다. 하지만 남겨진 두 아들의 존재가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했다.
그리고 사별 6년 만에 찾아온 두 번째 사랑. 닫혀 있던 말선 씨의 시간은 창래 씨를 만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선 씨를 진심으로 아끼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아들 최지훈(37) 씨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육지로 떠났지만, 홀로 농사와 양봉을 해오던 어머니가 마음에 걸려 두 해 전 다시 제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권세나(31) 씨와 결혼했고, 3개월 전 딸 지나를 품에 안으며 아빠가 됐다. 아이를 품어 보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 깊어졌다는 지훈 씨는, 한편으로 어머니가 두 번째 사랑과 행복하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다.
올가을 말선 씨네 농장은 유난히 풍년이다. 귤도, 키위도, 벌꿀도 잘 익어가지만 그보다 더 풍성한 건 주변에 가득한 사람들의 마음이다. 한때 모든 걸 잃었다고 믿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지금 그녀 곁엔 사랑하는 사람들과 따뜻한 계절이 찾아와 있다. 메밀꽃처럼 조용하지만 강하게 피어오른, 고말선의 두 번째 사랑이 완연한 가을을 물들이고 있다.
뉴스컬처 김기주 kimkj@nc.press
Copyright ⓒ 뉴스컬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