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ST
점토의 무한대
지난 9월에 열린 디자인 마이애미 전시 «창작의 빛: 한국을 비추다»를 통해 한국 공예의 미감에 푹 빠졌던 이들이라면 놓치면 안 되는 전시가 있다. 글래드스톤 서울이 한국 출신 세라믹 작가 3명의 작업을 선보이는 그룹전을 11월 20일부터 2026년 1월 3일까지 진행한다. 이헌정, 김주리, 김대운은 원초적인 예술 재료인 점토를 각자의 방식으로 다루면서 불완전함을 수용하고 포용성을 확장하며 회복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헌정은 도예·설치·디자인·건축을 아우르는 다학제적 작가로, 가마에서 굽는 전통 도예 기법에 내재된 우연성을 창작의 모티프로 삼아 아름다움의 본질과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완벽한 대칭에서 벗어난 비대칭적 조형 언어로 전통을 파격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김주리는 물질성과 덧없음, 영속성과 순간성이라는 이중성에 천착한다. 물속에서 서서히 녹아내리도록 의도적으로 제작한 흙집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건축 환경의 취약성을 숙고하는 〈휘경〉 시리즈로 주목을 받았다. 버려진 도자 조각을 재조립하는 김대운은 부서진 조각과 파편을 겹겹이 쌓아 불규칙한 리듬을 빚어낸다. 불완전함을 감추기보다 혼합 매체로 확장해 젠더와 다양성을 실험하며, 의도적 균열을 도입해 지배적 문화 서사를 슬쩍 흔들어 놓는다. 세 작가의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공존하고 함께 호흡할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호안 미로의 몽상과 시학
2022년 «호안 미로: 여인, 새, 별» 이후, 20세기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스페인 작가 호안 미로와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내면과 무의식에 대한 자유로운 예술적 실험을 전개한 미로는 르네상스 후기의 회화 전통과 결별하고 원근법, 중력, 부피가 주는 환영에서 해방된 공간을 창조해냈다. 1925년 ‘꿈의 회화’를 추구하고, 우주의 탄생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초현실주의 작품 〈세계의 탄생〉을 세상에 내놓으며 전성기를 맞이한 그는 1940년대 후반부터 조각에 본격적으로 몰두해 1960년대 후반부터는 브론즈를 비롯한 다양한 재료를 실험하며 조형 언어를 확장했다. 1966년 청동으로 제작한 〈태양의 새〉, 〈달의 새〉가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번 전시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1970~1980년대 청동 조각작품에 집중한다. 말년에 이르러 시적이고 상징적인 그의 조각은 완숙함을 보여주며, 회화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유희적인 형태 감각에 도달했다. 소개되는 10여 점의 조각작품은 미로의 조형 세계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며, 서양 조각의 문법 속에서 한국적인 미감과 공명하는 접점을 모색하는 제안이 될 것이다.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11월 19일부터 2026년 1월 17일까지 미적인 조형성과 형태 실험이 돋보이는 미로의 조각과 교감할 수 있다.
내일을 위한 기록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에 자리한 성곡미술관이 어느새 서른 살을 맞이했다. 성곡미술관에 축적된 시간과 기억, 추억 등을 예술적 언어로 탐색하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회화, 사진, 설치, 영상,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14인의 국내외 작가들이 미술관과 그 주변의 풍경, 계절(여름)의 향기, 일상의 흔적을 감지하고 이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했다. 성곡미술관 하면 떠오르는 것은 조각정원이다. 성곡미술관에 애착을 가진 이들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장소다. 전시를 관람한 후 이곳에서 더위를 식히거나 나무 벤치에 앉아 시집을 읽던 추억이 아련하게 남아 있기 마련이다. 이런 정원의 추억과 샘솟는 생명력을 포착하듯 윤정미는 올여름 무더위가 절정에 이른 시기에 정원을 촬영했다. 이창원은 커피 가루로 조각정원을 본뜬 설치작품 〈성곡의 조각들〉을 완성했고, 김준은 미술관의 내부와 외부에서 채집한 소리와 수집물을 바탕으로 〈잔상의 정원〉을 제작했다. 특히 눈여겨볼 만한 것은 전시실 전체를 하나의 회화적 구조로 전환한 조르주 루스의 작품이다. 오직 하나의 시점에서만 완전한 이미지로 인식되는 작업을 통해 성곡미술관이 오롯이 작품이 되는 독특한 시각적 사건을 창조해냈다. 개관 30주년 기념전 «미술관을 기록하다»에서 펼쳐지는 예술적 오마주에 12월 7일까지 동참할 수 있다.
THE UNCANNY FEMININE
올해 프리즈 서울에서 선보인 작품 중에 젊은 엄마들이 유모차와 함께 있는 그림 한 점이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다. 〈플로리다 엄마들(Florida Moms)〉의 첫인상은 밝고 유쾌하지만, 살펴볼수록 점점 불안감이 전이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바로 줄리 커티스의 작품이다. 그의 작업은 주로 여성의 몸에 초점을 맞춘다. 머리나 다리 등을 해체하듯 파편화하거나 전형적인 여성성을 상징하는 머리카락이나 하이힐을 과도하게 강조한다. 초현실적이거나 언캐니한 감각을 통해 여성성을 포착하지만 다분히 몽환적인 방식으로 불안마저 기입한다. 커티스에 따르면, 그의 이미지는 "유머와 어둠, 기이함과 일상, 기괴한 형상과 선명한 색채의 상보성"을 추구한다. 2023년 화이트 큐브 홍콩에서 열린 전시 «Bitter Apples»의 경우, 오슨 웰스 감독의 영화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7)이나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현기증〉(1958)을 연상시키는 미스터리한 여성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줄리 커티스의 국내 첫 개인전 «Maid in Feathers»가 11월 5일부터 12월 19일까지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 열린다. 모성, 자연, 양육이라는 주제에 맞춰 일상의 평범함과 부조리함을 동시에 담아내는 작가 특유의 감각을 보여줄 예정이다. 자연과 문화의 관계, 야생과 길들여짐 사이의 균형에 대한 커티스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의 주요 모티프인 펠리컨은 자기희생과 내적 정화를 상징한다.
영원한 시간 여행
로랑 그라소는 일식, 검은 태양, 태양풍 같은 우주 현상을 작품에 소환해 불확실한 세계를 창조해왔다. 2021년 전남도립미술관의 개관 기획전 «로랑 그라소: 미래가 된 역사»에서는 윤두서의 〈말 탄 사람〉과 정선의 〈금강내산총도〉를 재해석한 〈과거에 대한 고찰〉을 선보여 감탄을 자아낸 바 있다. 말 탄 사람과 금강산 사이에 천체 현상을 슬쩍 넣음으로써 불길한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에게 한국은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곳으로, 이는 그라소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그라소가 개인전 «미래의 기억들»로 다시 돌아왔다. 이 전시 제목을 보고 혹시 기시감이 느껴진다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장 누벨이 설계한 리움 M2의 건물 외벽을 장식한 강렬한 문구 ‘memories of the future’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은 〈오키드 섬〉이다. 대만 란위섬에서 촬영한 영상에 검은 직사각형을 더해 시각적 교란을 일으키고, 아름다운 자연과 현실의 위협이 충돌하면서 긴장감을 촉발한다. 재난 회화라고 칭할 수 있는 〈과거에 대한 고찰〉 시리즈와 구리로 만든 구름 조각(〈구름 이론〉), 40개의 네온(〈영원한 불꽃〉)이 영상작품과 함께 어우러져 1층 전시실을 실험의 장으로 만들고 있다. 그라소는 “과거의 역사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유연함을 가지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역설한다. 그의 시간 여행을 내년 2월 22일까지 대전 헤레디움에서 경험할 수 있다.
OUR LEGACY
서울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차연서와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허지은의 2인전 «sent in spun found»가 두산아트센터 두산갤러리에서 10월 22일부터 12월 13일까지 개최된다. 죽음과 상실, 애도와 치유를 위한 작업에 천착해온 차연서는 아버지(한국화가 차동하)의 유품으로 남겨진 채색된 닥종이를 오려 완성하는 페이퍼컷 콜라주로 〈축제〉 연작을 시작했다. 반면 믿음의 의미와 종교 시스템을 탐구하는 허지은은 인간의 신념 체계와 그 힘을 이해하기 위한 일련의 작품을 만들어왔다. 서로 다르지만 유산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두 작가는 각자의 사적인 경험을 토대로 가족, 종교, 사회적 현상 등을 해석해 독자적인 시각언어로 풀어낸다. 두 개의 서사는 직접 교차하지 않지만, 이들의 작업은 특정한 믿음을 기반으로 경계의 횡단으로 나아가고 있다. 차연서는 아버지의 유산을 활용해 생사의 경계에 있는 존재들의 비통함을 위로하고 어루만진다. 허지은의 작업 또한 보다 나은 삶과 영적 경험을 위해 태평양을 횡단한 가족사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의 삶에 남겨진 것들, 즉 각자의 유산을 곱씹는 두 작가는 공간 설치, 영상, 퍼포먼스를 아우르는 실험을 통해 환대받지 못하고 배제된 타자들과 소통함으로써 소외된 이야기를 회복시키고자 한다.
한국 현대건축의 아이콘을 떠나보내기
‘자서전’이라고 쓰고 ‘이별기’라고 읽는 전시가 있다. 힐튼서울을 조명하는 전시 «힐튼서울 자서전»이 그렇다. 힐튼서울은 1983년 완공 이후 40년간 남산 자락을 지켜왔으나 팬데믹으로 인한 영업 부진과 양동지구 재개발 계획으로 2022년 영업을 종료했다. 현재 철거 중인 힐튼서울의 탄생부터 해체까지, 더불어 그 이후의 남겨진 과제를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살펴보는 전시다. 한국 현대건축의 대표작인 힐튼서울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제자로서 모더니즘 건축관을 체득한 건축가 김종성의 업적이다. 1980년대 국제 행사를 위한 무대로 활용되면서 한국의 세계화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힐튼서울의 건축적 미학은 그랜드 아트리움으로 대변된다. 지하 1층에서 천장까지 높이 18m, 메인 로비 입구에서 반대편까지 깊이 64m에 달하는 대형 공간을 완성했다. 건축적으로 다양성이 부족한 도시 서울에 풍요로운 공간을 선사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김종성의 표현을 따르자면, “가슴이 솟아오르는” 웅장한 아트리움이 펼쳐졌다. 후배 건축가들이 이 공간을 보존하고자 노력했으나 결국 작별을 막지 못했다. 사라지는 건축물을 애도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사회적 기억으로 전환되는 방식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전시다. 힐튼서울과 인접한 이웃 건물 피크닉에서 2026년 1월 4일까지 작별 인사를 보낼 수 있다.
한국 추상조각에 인상적인 발자취를 남긴 채 1990년 불의의 사고로 45세에 작고한 조각가가 있다. 조각의 본질인 매스를 탐구하며 쉴 새 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했던 작가 전국광이다. «전국광: 쌓는 친구, 허무는 친구»는 전국광의 조각 작업을 ‘쌓다’와 ‘허물다’라는 상반된 조형적 행위에 초점을 맞춰 구성한 전시다. ‘적(積)’ 연작과 ‘매스의 내면’ 연작에 해당하는 석조각, 목조각, 금속조각, 마케트 등 작품 100여 점을 통해 작가의 통찰과 작업 방식을 조명한다. 자연의 힘과 에너지의 작용을 쌓기 행위를 통해 담아내는 작업이나 볼륨을 최소화함으로써 매스의 무게에서 벗어나고 저항하는 다양한 실험 과정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전국광의 글쓰기를 소개한 섹션에서는 “자신의 느낌을 지나치게 많은 양으로 타인에게 노출시키지 말 것” 같은 단문들이 그의 내면적 단단함을 표출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권진규와 전국광을 동시에 만난다는 사실이다. 2023년 6월,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은 1층에 〈권진규의 영원한 집〉(상설전)을 작가의 안식처로 마련한 바 있다. 이제 2층에서 전국광의 전시가 열리면서 두 작가의 서로 다른 작품 세계가 절묘하게 호응을 이루게 되었다. 권진규는 한 지붕 아래 잠시 동안 전국광을 ‘함께하는 친구’로 받아들인 모양새다. 이들의 아름다운 동거는 2026년 2월 22일까지 계속된다.
전종혁은 프리랜스 에디터다. 바자전 이후 다시 성곡미술관을 방문해 조각정원에 있는 허름한 나무 벤치에 앉아봤다. 30년을 함께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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