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미식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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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미식 다이어리

더 네이버 2025-11-06 12:04:48 신고

일어나니 서늘한 바람이 분다. 가을이다. 햇살이 낮게 기울고 들이쉬는 공기의 냄새가 바뀌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여름이었지만, 흙 내음을 머금은 시원한 바람이 지속되자 무더위의 기억도 흐려진다. 지구가 아픈 것인지 기후 변화 탓인지는 모르지만 올해는 찌는 듯한 열기를 식혀주는 장마와 태풍이 없었다. 가을이 무르익어야 할 시기에 늦은 장마로 쓸쓸한 기운마저 감도는 요즘이다. 


수확의 계절, 가을.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추석을 지내는 것을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을은 풍요의 상징이다. 열대 다모작 지역은 해당 사항이 없겠지만 쌀을 주식으로 하는 지역뿐 아니라 빵(밀)을 주식으로 하는 지역에서도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다. 한 해 땀 흘린 결실을 거두는 계절. 풍요를 선물한 대지에, 그리고 조상님과 신에게 올해도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는 시간이다.


한반도에서 자라는 대표적인 농작물인 쌀, 콩, 팥, 조, 수수 등은 모두 가을에 수확한다. 그래서 우리 선조는 오래전부터 가을을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계절”이라고 했다. 오곡은 풍요와 다산, 건강을 상징했다. 그뿐 아니라 밤, 대추, 은행 등 견과류도 가을에 수확하여 송편 속 재료로 사용하거나 그대로 차례상에 올리곤 했다. 채소와 뿌리작물도 가을이 제철이다. 가을 무는 단맛이 강하고 수분이 많아 배추와 함께 겨울 김장의 주역이고, 토란으로 정성스레 끓인 국은 추워지는 날씨에 따뜻한 밥상 주인공 자리를 차지했다. 마을에 주렁주렁 열린 감은 단감으로도 먹지만 홍시, 곶감 등 가공해 계절 간식으로 먹으며, 들녘에 노랗게 익은 늙은 호박은 가을이 주는 보약이었다. 


가을에는 육지뿐 아니라 바다에서 나는 식재료 역시 풍성하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전어가 대표적이다. 따뜻했던 여름의 바다가 차가워지기 시작하면 전어, 고등어, 청어, 꽁치, 삼치, 정어리 등 등푸른생선은 겨울철 번식기와 저수온기를 견디기 위해 체내에 지방을 축적한다. 바다에는 여름에 번성했던 플랑크톤과 소형 어류가 여전히 풍부해 생선들은 활발히 이동하며 먹이 섭취에 집중한다. 그래서 가을철 건져 올린 생선들은 하나같이 지방이 풍부하고 윤기가 돌 정도로 기름기가 가득하다. 좋은 숯에 구우면 기름지고 고소한 단맛이 멀리 옆 동네까지 퍼진다. 


전어가 대표적인 바다 식재료라면 산에는 가을의 보석인 송이가 자란다. 송이는 소나무 뿌리와 함께 살아야만 자라기 때문에 인공 재배가 불가능하다. 여름철 장마가 지나고 서늘하고 건조한 가을이 되면, 오래된 소나무 숲, 낙엽과 송진 냄새가 밴 산기슭에서 송이가 태어난다. 한국은 송이가 잘 자라는 붉은 소나무 품종이 전국에 분포하고, 산이 많고 경사가 완만해 송이 식생에 적당한 온도, 배수, 환기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온도와 습도가 잘 맞는 가을날에 자란 송이는 진한 소나무 수액 향과 달콤하고 묵직한 잔향을 머금고 있다. 양양, 울진, 봉화 등에서 채취한 밀도가 높고 잔향이 긴 한국산 송이는 세계적으로도 귀한 대접을 받는다. 일본 최고급 식당에 가도 셰프가 한국에서 어렵게 공수한 송이라며 자랑을 한다. 은은한 소나무 향과 산미, 그리고 자연의 냄새가 어우러진 복합적인 맛은 한국의 가을을 대표하는 맛과 향이라고 할 수 있다. 


가을이 오는 것을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여름의 습한 바람이 사라지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하고 마른 바람이 불기 시작하며, 여름의 강렬한 백색광이 사라지고 낮아진 햇살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매미 소리가 사라지고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하며, 시골에는 황금빛 물결이 출렁이고, 달큰한 메밀꽃 냄새가 번진다. 밥상 위에 반찬과 국이 바뀌며 가을의 시작을 알린다. 


서울에서 계절의 변화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식당 중 하나가 권숙수다. 2017년 미쉐린 가이드 서울이 처음 발표되던 해에 2스타 레스토랑에 이름을 올린 권숙수는 현재까지 그 별을 유지하며 한식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다. 권우중 셰프는 계절의 변화를 무르익은 시간의 질감으로 표현한다. ‘숙수’란 조선시대 궁중과 반가에서 음식을 빚던 장인을 뜻한다. ‘권숙수’라 이름 지음은 스스로를 ‘요리사’보다는 ‘숙수’에 가깝게 여긴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의 요리는 가장 제철인 식재료로 계절을 기록하고, 발효를 통해 시간의 가치를 담는다. 45년 씨간장과 같이 오랜 숙성이 그려낸 시간의 맛을 음식에 자연스럽게 입힌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방문한 권숙수는 계절에 알맞게 초가을의 식재료와 분위기를 물씬 담아내고 있었다. 복잡한 청담동 거리 속 도시인의 쉼터 같은 공간은 한국적 고전미와 모던한 인테리어 디자인이 조화를 이룬다. 테이블마다 올려둔 반상 또한 한식의 멋을 잘 살린다. 


가을로 들어가는 ‘첫 장’으로 내어주는 주안상은 다양한 한입 거리가 각각의 매력을 조화롭게 뽐낸다. 투명하게 굳은 한우 족편은 우족에서 우러나온 진한 젤라틴이 혀끝에서 천천히 녹으며 맑고 깊은 육수 향이 입안에 길게 퍼진다. 묵직하지만 기름지지 않은 감칠맛이 권숙수에서 추구하는 절제의 미학을 보여준다. 흰 도자기 그릇에 담긴 연근 감자 타락죽은 새벽안개처럼 부드럽고 미세한 단맛이 입안을 포근히 감싼다. 같이 곁들인 캐비아는 짠 향으로 고요함을 깨우며 단짠의 조화가 은은하게 퍼진다. 감자의 단맛과 캐비아의 염분이 좋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금빛 유기그릇에 담긴 한치는 섬세하게 썰려 있는데 입에 넣으면 서걱이는 첫 식감이 금방 부드럽게 미끄러져 한치의 단맛과 미세한 바다 내음이 깔끔하게 떨어진다. 김부각 말이와 꽃게 알젓은 짭조름한 김 향과 바다의 고소함이 동시에 느껴져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바다를 그려낸다. 주안상의 하이라이트는 가지와 대게살 튀김으로, 얇게 썬 가지 사이에 대게살이 샌드위치처럼 채워져 있고, 가볍게 튀긴 튀김옷은 얇고 바삭하며, 게살의 향긋한 단맛과 가지의 은은한 향이 완벽한 온도로 마무리된다.


이어 ‘가을의 맛’이라 명명한 까치버섯 증편과 감자칩이 등장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갈하고 아름다운 프레젠테이션에 감탄사가 나온다. 하얀 그릇 속으로 얇은 감자칩 세 장이 포개져 있고, 그 아래로 산초 오일에 버무린 까치버섯을 떡으로 감싸 만든 한 점이 향긋한 들기름 위에 잠겨 있다. 무채색의 조합으로 절제된 한국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한 접시다. 떡의 표면은 부드러웠고 속에는 가을을 나타내는 까치버섯이 숨어 있다. 들기름의 고소함이 코끝으로 느껴지고 이내 떡의 쫀득한 질감이 버섯 향과 함께 천천히 올라오는데, 감자칩의 바삭함이 요리 전체에 리듬감을 더한다. 들기름을 통해 발효와 시간의 의미를, 까치버섯과 감자를 통해 계절감을 보여주는데, 시간의 질감을 여러 번 덧칠하여 은은하게 표현하는 권숙수 특유의 스토리텔링이 잘 드러난다. 


갈치찜은 우리가 흔히 아는 붉은 양념의 갈치찜이 아닌, 은빛 비늘이 살아 있는 흰 갈치 조각과 방아잎과 잣으로 만든 소스가 섬세하게 놓여 있다. 잣의 고소함은 크림처럼 부드럽고 갈치의 살결은 입안에 넣는 순간 천천히 녹는다. 소스에서 우러나는 숲의 향기와 갈치에서 나오는 바다의 짠맛이 조화롭고, 단정한 여백과 은은한 색감과 향은 수묵화 같은 한식의 미니멀리즘을 잘 드러낸다. 다음은 가을의 정점을 보여주는 송이와 떡갈비 요리로, 생송이 슬라이스 향이 멀리서부터 은은하게 퍼져 청명하고 단정한 향기를 이룬다. 떡갈비는 놀랄 만큼 깊은 육즙과 한 입 베어 물면 부드럽게 무너지는 고깃결이 완성도를 높인다.


메인으로는 눈개승마 솥밥 반상을 선택했는데, 눈개승마 삶은 잎의 쌉싸래한 맛이 윤기가 도는 밥의 단맛과 섞이면서 입안에는 산 내음과 가을의 바람 내가 동시에 감돌았다. 함께 나온 아욱국은 버섯 향이 가득해 온전한 가을의 온도를 전해준다. 디저트는 가평 잣으로 만든 백설기와 아이스크림으로, 가을의 대표 식재료인 잣을 이용하여 부드럽고 긴 여운으로 마무리된다. 권숙수는 단순히 고급 한식을 내는 레스토랑이 아니라 계절이 조용히 익어가는 공간으로, 시간을 맛으로 표현하는 미학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청담동의 조용한 골목에 위치한 ‘키고’는 일본어로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들’이란 의미로, 역시 계절의 흐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봄에는 벚꽃과 새싹, 가을에는 달, 단풍, 수확과 같은 단어들이 키고로 쓰인다고 한다. 5,000여 개에 달하는 계절과 관련된 단어만큼이나 다양하고 신선한 재료를 이용하여 계절을 온전히 전달하고자 하는 셰프의 마음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산다이’에서 수학한 이성혁, 정민선 셰프는 교토 요리를 생생하게 서울로 옮겨온다.


“한 끼 식사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 계절의 공기와 향, 온도까지 함께 느낄 수 있는 경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셰프의 철학처럼 키고의 요리는 화려하지 않다. 대신 이 계절에 가장 맛있고, 그 순간에 가장 어울리는 재료와 온도를 포착해 접시 위에 담담히 올려  놓는다. 식사하는 동안만큼은 일상의 걱정을 내려놓고 밥 짓는 냄새, 다시 끓이는 소리, 칼질 소리, 접시에 얹는 순간까지, 그 모든 과정을 한 점의 요리 속에 따뜻함으로 담아내고자 한다고.


키고의 가을 메뉴는 유바로 감싼 옥돔과 붕장어 찹쌀 요리로 시작한다. 둘 다 키고의 대표 메뉴로 다시의 뭉근한 감칠맛이 매력적이다. 결이 얇고 부드러운 유바는 다시 육수 위에 살짝 흔들리고 옥돔의 살결은 투명하고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다. 요리의 온도는 알맞게 따뜻하여 혀끝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녹여준다. 붕장어는 숯불에 구워 불맛을 입히고 따뜻한 온도감을 간직한 채 찹쌀의 단맛과 함께 부드럽게 입안에 퍼진다. 


국물 요리로는 새우, 우니, 연근 완자가 들어간 오완이 등장하는데 뚜껑을 여는 순간 따뜻한 증기가 피어오르고 단정하고 맑은 국물에 세 가지 맛의 완자가 감칠맛과 균형을 잡아준다. 국물은 가쓰오와 다시마의 감칠맛이 우아하게 스며들어 있고, 유자 슬라이스 한 점이 뒷맛을 산뜻하게 정리해준다. 따뜻하고 향긋하지만 자극적이지 않다. 초가을의 공기처럼 여운이 길고 편안하다. 이어서 나온 돌돔과 혼마구로는 산뜻한 시소꽃과 함께 은근한 단맛이 조화롭다. 바삭하게 구워낸 장어구이 위에는 산초 알갱이가 흩뿌려져 있고 은근하게 퍼지는 알싸함이 장어의 농후한 향을 한결 깨끗하게 해준다. 교토를 대표하는 초록빛 망간지 고추를 함께 내는데, 망간지의 아삭한 식감과 풋내가 느끼함을 덜어준다.


코스의 정점은 버섯 나베로 송이, 능이, 느타리, 싸리, 표고, 꽃송이 등 다양한 버섯을 담아낸다. 놋 냄비 안 고요히 끓는 국물에서 버섯 향이 천천히 퍼진다. 국물의 맛은 깊고 맑았고, 첫 수저를 머금자 향의 계절인 가을이 도래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서 나온 능이버섯 덴푸라와 산초 간장을 얹은 갈치튀김, 송이 솥밥, 곶감과 호지차 역시 성큼 다가온 가을을 온전히, 생동감 있게 담아낸다.


가을은 수확과 감사의 계절이다. 자연이 선물해준 풍요로운 식재료가 산, 바다 어디서나 절정에 다다른다. 한 해 땀 흘려 일군 곡식을 입안 가득 느끼며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가을이 지나가는 시간을 맛으로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한다.   

권숙수

1 가을의 맛 (까치버섯 증편과 감자칩, 들기름). 2 주안상(한우 족편, 타락죽과 캐비아, 김부각 말이와 꽃게알젓, 한치회, 백화고 만두, 대게와 가지튀김). 3 다과 카트 . 4 눈개승마 솥밥.

키고

1 장어구이, 산초, 망간지, 영귤. 2 금태와 버섯 나베. 3 곶감, 팥, 호지차. 4 갈치튀김, 산초 간장, 능이버섯, 저염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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