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시간을 훔치는 법, ‘미지를 위한 루바토’를 남겨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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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명문장] 시간을 훔치는 법, ‘미지를 위한 루바토’를 남겨두기

독서신문 2025-11-04 11:19:47 신고

간혹 너무 좋은 시를 읽으면 이 시는 활자화된 상태가 더 좋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현현하였음에도 이렇게 좋다면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을 때는 얼마나 더 좋았을까, 우리는 그것을 공유할 수 없구나, 그렇지만 참 좋은 시였겠구나 하는 상상을 이어 하게 된다. 그러나 어쩌면 시의 몸이, 언어라는 매체가 그 시에게 하나의 길이 되어주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22쪽>

연주자에게 곡이 실체적으로 다가오는 순간, 그 곡이 가진 감정에 완벽히 감응하게 되는 순간, 루바토는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어떤 음의 시간을 빼앗아 어떤 음에게 주어야 하는지, 곡에 대한 몰입도가 높을수록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는 사실은 음악의 신비로움이다. <63~64쪽>

나는 시의 초고를 쓴 후에 오랜 시간 퇴고를 하고는 하지만, 격렬한 퇴고 과정 이후에도 결국에는 초고의 형태와 내용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잦다. 왜냐하면 퇴고는 대체로 루바토를 깎아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시가 추동하는 대로 빼앗기거나 빼앗은 언어를 규범대로 되돌리는 동안 시는 자신이 가진 미지를 잃는다. <65쪽>

문제는 그것들이 쓰고 보니 꽤 괜찮아 보였다는 것이었다. 폐허가 되었다가 급하게 다시 지어진 도시라니, 살 때는 지옥 같았지만 글로 다듬고 나서는 상당히 문학적으로 보였다. 나는 글로써 그곳의 일들을 가공하고 묘사하며 만족스럽지 않았던 지난 일 년의 삶을 납득해가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76~77쪽>

글을 쓰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문장 다음에 어떤 문장을 쓸지 선택하는 일이고, 매 시간 새롭게 탄생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중 어느 순간을 글 속으로 건져 올릴지 고민하는 무의식의 험난한 낚시질 곁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일이다. <85쪽>

누군가 나에게 “김선오 시인의 기억력이 나쁜 이유는?” 하고 물었고 나는 깜짝 놀라 “어떻게 아셨어요?” 하고 답했는데, 알고 보니 텍스트에 “나는 기억력이 나쁜 편이다”라는 문장을 두 번이나 썼던 것이었다. 모두가 웃었고 나는 정말로 기억하지 못했기에 물어본 것이었으나, 덕분에 내가 쓴 글의 진정성을 증명하게 되어 약간 기뻤다. <103쪽>

길을 걸으며 인간 아닌 존재들을 본다. 산책하는 개와 일광욕하는 새와 길고양이들. 어느날 거리에서 주인과 함께 걸어오는 개 한 마리와 눈이 마주친다. 나의 얼굴은 절반쯤 마스크에 가려져 있지만 나는 개를 향해 웃는다. 호의를 알아차린 개가 경계를 풀고 꼬리를 흔들며 나의 무릎으로 달려든다. <113쪽>

그러나 ‘상처가 있었고, 그것이 회복되었음’을 증명하는, 상흔의 역사가 가시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몸의 일부가 ‘흉터’라 불린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동시에 어딘지 쓸쓸하다. <119쪽>

서툴거나 세련되지 못하더라도 갈수록 더 ‘진짜’만을 하고 싶어지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153쪽>

나는 꼭 한 군데는 망가진 캐스터네츠를 잡고 서서
피아노가 나오고 트라이앵글이 나오고
이제 캐스터네츠 차례가 될 때까지
자리에 서서 어쩔 줄 몰라 했어
캐스터네츠를 제대로 손에 쥐기도 힘들었는데
어쨌든 연주는 따라가야 했고
망가진 캐스터네츠를 떨어뜨리지 않고 치느라
어떻게든 이를 맞추어 소리를 내게 하려고 애를 쓰느라
손에는 쥐가 나고, 캐스터네츠가 자꾸
손가락을 물어서 피멍이 들고 <162쪽>

『미지를 위한 루바토』
김선오 지음 | 아침달 펴냄 | 168쪽 | 16,000원

[정리=이자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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