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지수가 사상 처음으로 4000선을 돌파하는 등 축포를 쐈지만 주주권익은 여전히 글로벌 자본시장 눈높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시가총액 3000조원을 넘어설 정도로 기업의 가치와 규모는 커졌지만 정작 주주의 제안과 감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4000피 시대 개막을 계기로 자본시장 안팎에선 '권고적 주주제안'을 제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권고적 주주제안은 주주총회에서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경영진에게 특정 정책이나 공시, 계획 수립 등을 권고할 수 있는 제도다. 주주가 경영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도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소통형 제도'로 이미 미국·영국·프랑스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활용되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9년차…실효성 논란에 주주권익 여전히 제자리걸음
주주권익 보호를 위해 2016년 도입된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 원칙)는 도입된 지 9년이 지난 지금까지 실효성이 낮다는 지적을 꾸준히 받고 있다. 기관투자자들이 '경영권 간섭 논란'을 우려해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거나 주주제안에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서다. 주주권익 보호를 위한 제도가 있지만 실제로는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사실상 허울뿐인 제도에 머물자 자본시장 안팎에선 '권고적 주주제안'을 대안으로 주목하고 있다. 이 제도는 주주총회에서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회사가 주주의 의견을 공식적으로 검토·공시하도록 유도해 경영진과 주주 간의 소통창구 역할을 한다. 대표적 사례으로는 미국의 'Say-on-Pay(임원 보수 자문투표)'가 손꼽힌다. 강제력은 없지만 기업이 주주 의사를 무시하기 어려운 제도로 안착했다.
반면 한국은 주주제안의 범위가 여전히 협소하다. 상법 제363조의2에 따라 주주제안은 '주총 권한사항'으로 제한돼 있다. 정관 변경·이사 선임 등 법적 결의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이에 따라 기후변화 대응, 인적자본관리, 지배구조 개선 같은 비재무적 이슈는 주총 권한이 아니라는 이유로 상정조차 되지 않고 있다.
실제 한국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올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주주제안이 상정된 기업은 41개사에 불과했고 이 가운데 가결된 안건은 10건뿐이었다. 임원 해임·정관 변경 등 단기 이슈가 60% 이상을 차지했으며, ESG·보상정책·지속가능경영 관련 제안은 거의 전무했다. 사실상 주주의 제안권을 제도적으로 막고 있는 셈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 제도는 주총 안건이 아니면 논의조차 못한다는 점에서 글로벌 자본시장과 비교해 매우 폐쇄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며 "이사회 권한은 존중하되 주주와의 소통을 제도화할 수 있는 통로는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는 권고제안으로 ESG 논의 확장…한국은 도입 논의만 '공회전'
권고적 주주제안은 단순히 주주와 기업의 관계를 개선하는 장치를 넘어 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는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증권거래위원회 규정에 따라 권고적 제안을 명문화했으며 일정 금액 이상의 주식을 일정 기간 이상 보유하면 누구나 제안을 낼 수 있다.
기업은 '일상적 경영사안'이나 '경제적 연관성이 없는 안건'을 제외하고는 이를 위임장에 포함해야 한다. 이 제도 덕분에 미국 기업들은 기후변화, 인권, 보상정책 등 폭넓은 의제를 주총에서 논의하고 있다.
영국도 2002년 'Say-on-Pay'를 도입해 임원 보수정책을 권고투표로 상정했고 2013년 이후에는 일부 항목에 법적 구속력을 부여했다. 프랑스도 상법을 통해 '권고적 표결'을 허용하고 있으며 지속가능경영과 관련된 제안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선진국은 권고적 제안을 통해 이사회 권한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주주의 목소리를 제도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지속가능 경영의 화두로 떠오른 ESG 관련 주주제안이 급증했다. 지난해 전체 주주제안의 62%가 환경·사회(E&S) 이슈였다. 2020년 대비 58% 증가한 수치다. 유니레버는 3년마다 '기후전환계획(CTAP)'을 권고투표에 부쳐 97.5%의 찬성을 얻었고, 셸은 에너지 전환 전략을 상정해 78%의 지지를 받았다. 권고제안은 단순한 표결 절차가 아니라 기업의 전략과 사회적 책임을 조정하는 역할도 맡고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권고적 주주제안을 도입할 지 말지 논의만 반복되고 있다. 올해 3월까지 제출된 주주제안의 절반 이상이 소액주주 또는 주주연대가 낸 안건이었는데 이들은 권고제안 신설과 집중투표제 도입을 요구했다. 여당은 상법 개정안에 권고적 주주제안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아직까지 구체적 입법 일정은 없다.
전문가들은 권고제안을 무분별하게 허용하기보다 ESG·보상정책 등 공익적 사안으로 제한하고 명확한 제외 기준을 두는 절충형 모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사회 권한을 보장하면서도 주주가 기업에 의견을 낼 수 있도록 제도적 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선 공시 의무 강화와 소통 비용 증가 등 부담이 따르지만 이는 시장 신뢰 회복을 위한 불가피한 비용이라는 설명이다.
정지수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4000피 시대에 걸맞은 시장 성숙은 주가가 아니라 제도의 신뢰에서 완성된다"며 "현행 상법상 권고적 주주제안을 수용하기 어려운 만큼 주주총회 결의의 효력에 예외 규정을 둬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권고결의 형태를 인정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권고적 주주제안을 남용할 수 없도록 안건 제외 사유 등을 규정해 안전장치도 갖춰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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