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계의 주인'(10월22일 공개)은 윤가은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개척한다. 그의 영화 주인공이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디딘 초등학생 여자 아이에서 성인이 되기 직전인 고등학생 여자 청소년으로 성숙했다는 건 이 진화의 징후다. '우리'라는 한정되고 닫힌 호명을 넘어('우리들' '우리집') 세계라는 무한하고 열린 단어를 제목에 등장시킨 건 확장의 징표일 게다. 개인의 속내를 포착해 신중하고 정교하게 담아내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마음과 마음이 모이고 연대해 운동하는 것까지 보고 나면 이 작품이 윤 감독의 새 챕터라는 걸 확신하게 된다. 사려깊은데다가 적극적이기까지 한 '세계의 주인'은 타성에 젖어 무기력해 보이기까지 하는 최근 한국영화계에 그래도 남아 있는 저력이 돼준다.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고등학생 주인(서수빈)의 주도적 키스가 담긴 첫 장면은 이 영화가 앞으로 무엇을 다루게 될지 암시하면서 동시에 어떻게 드러낼지 선언한다. '세계의 주인'은 에둘러 가거나 피해 가는 법 없이 직격하려 한다. 그러니까 수호가 주도한 서명 운동에 전교생 중 유일하게 동참하지 않은 주인이 수호의 거듭된 설득에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수호의 운동 방식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데 거리낌 없는 건 어쩌면 이 영화가 주제를 다루는 태도나 다름 없다. '우리들'(2016)과 '우리집'(2019)에서 얼마든지 서정적일 수 있다고 증명한 윤 감독은 이 문제만큼은 불편하더라도 직면하고 직시해야 하며, 더 정확하면서 더 예리한 메시지를 내놔야 한다는 의무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세계의 주인'은 고발하는 게 아니라 증언한다. 성폭력이 소재인 대개의 영화가 피해의 참상을 까발리거나 처벌의 지난함을 비판하거나 피해 회복 과정의 고통을 목도케 하는 것과 달리 '세계의 주인'은 생존 이후의 삶 역시 찬란하다고, 그럴 수 있다고 입증하려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토록 빛나는 게 무엇이 잘못된 거냐고 반문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주인의 아픔을 담아내는 것보다 이 아이의 성격과 일상을 보여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이를 통해 주인이 그 자체를 공들여 구체화한다. 이주인은 장난기 많고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 종잡을 수 없는 여자친구, 친구 같은 딸, 엄하면서 다정한 누나, 착실한 제자다. 짐작조차 되지 않는 그 고통 속에서도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어떤 형태의 피해자다움도 거부한다. 그것이 악의든 선의든 피해자다움을 규정하고 강요할 순 없다고 주장한다. 흔히 피해자다움은 피해를 탄핵하고 공격할 때 활용된다고 여겨지는데, 그 뿐만 아니라 피해를 인정하고 보호하려 할 때에도 종종 오용되면서 피해자성을 반복해서 강요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 피해가 여전히 종종 아프다. 주인이는 때로 세상이 원망스럽고 미도는 아직도 용서가 안 되니까. 그래도 그들은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웃고 떠들고 화내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일하고 돈 벌고 꿈꾸고 사랑한다. 말하자면 '세계의 주인'은 피해자다움을 주인다움으로, 세계의 모든 주인다움으로 맞받아치려는 시도다.
연대는 바로 그 주인다움을 지탱한다. '세계의 주인'은 성폭력 생존자의 피해 회복은 개인의 극기가 아니라 사회의 합심을 통해 비로소 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하는 것 같다.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만남만이 연대가 아니라 주인이가 어렵기 만하지만 어떤 선입견 없이 좋아했던 찬호도, 주인이를 위헤 체육관 문을 열어준 체육관 관장님도, 쉬지 않고 장난을 치는 같은 반 친구들도, 가해자에게 온 편지를 숨겨놓은 동생도, 결코 딸 곁을 떠나지 않고 그 모든 죄책감을 온몸으로 견디는 엄마도 모두 연대다. 이 사랑이 얼마나 간절하고 소중한 것인지 짐작하고 느낄 수 있기에 주인은 "난 괜찮다"고 말할 수 있고, 장래희망을 드디어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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