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 줄 평
“은유와 상징 사이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사물의 언어와 사유를 캐내는 시 일꾼.”
▲시 한 편
<첫눈> - 전영관
작은 눈사람을 손에 올려놓고
녹이지 않고 오래도록 살려내자는 내기에
이긴 적 있다
내 체온이 눈사람과 비슷한 것 같아
으쓱거리진 않았다
당신에게 체온을 다 나눠주어
이렇게 됐다고 으쓱거려놓고는
그 맑은 미간을 보았다
위는 작고 아래는 큰 불균형이 아름답다고
연애는 서로의 불균형을 채워주는 일이라고
트로트풍으로 말했다
언제라도 갓 태어난 듯한 나비는
환생한 느낌이다
전생의 기억들이 어지러워
흔들리며 날아다니는 것이다
하롱하롱
사늘한 날개들이 내려온다
▲시평
봉숭아 꽃잎으로 물들인 붉은 손톱이 첫눈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새끼손가락에 물을 들인 적 있지만, 첫눈 오기 전까지 남아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첫사랑이 찾아오지 않았으니, 이루어졌을 리 만무하다. 그저 속설일 뿐이라 하면 젊은 기대를 짓밟는 것일까. 소원의 성사 여부와 상관없이 첫눈, 첫사랑은 듣기만 하여도 볼이 붉어지는 말이다. 청춘의 특권이기도 하다. 시적 화자인 나는 당신과 좀 특이한 내기를 한다. “작은 눈사람을 손에 올려놓고”는 누구의 눈사람이 더 오래 녹지 않는지를. “오래도록 살려내기”를. 같은 크기에 같은 단단함이라면 당연히 손바닥 온도가 낮은 사람이 이긴다. 내기에서 이긴 나는 “내 체온이 눈사람과 비슷한 것 같”다고 변명 같은 한마디를 한다. 내기에 이겼다고 해서 우쭐하거나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기껏 사랑하는 사람과 심심풀이로 한 눈사람 녹이기 게임 아닌가. 진 사람의 기분도 살펴야 하고. 말은 이어진다. “당신에게 체온을 다 나눠주어/ 이렇게 됐다”. 그 말에 스스로 으쓱해진다. 자신의 일부, 혹은 전부와 마찬가지인 체온을 다 나눠준다는 것은 당신에 대한 지극한 사랑뿐 아니라 당신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가 의하는 바는 낮은 체온이다. 당신 손바닥 위에 올려진 눈사람 같은. 그 말을 하고는 당신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눈썹과 눈썹 사이 ‘미간’을 바라본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연인 사이도 한쪽으로 기운다. 그것이 사랑이든 경제적 능력이든 말이다. “맑은 미간”을 확인한 화자는 “연애는 서로의 불균형을 채워주는 일”이라 말한다. 프러포즈일 수도 있고, 내기에서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일 수도 있다. 허락의 순간,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다. 전생에서 만났다가, 서로 “환생한 느낌”. 사랑의 설렘과 막연한 불안감이 교차한다. 이 시는 작은 눈사람(사랑)이 녹아 서로의 체온으로 스미고, 첫눈(나비)으로 환생하는 사랑의 영원성을 감각적 경험으로 그려내고 있다. (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과 평론집 『연민의 시학』을 냈다. 경희문학상과 사이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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