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나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시대의 자손은 언어로 만들어진 책이기에, 언어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게 확실하다. 또한 선대에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 덕분에 한글로 글을 쓸 수 있었다고. - 작가의 말 중에서
천태산인天台山人 김태준은 국문학자이고, 학문은 그의 목숨이었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소진하며 오백 년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내 호적을 찾아 주었다. 그가 그렇게 목숨을 걸지 않았던들, 먼지투성이 고서들 틈에서 꺼내 준 해례본이 아니었던들 나는 천박한 태생으로 전락했으리라. <12쪽>
일주일 전이었다. 여느 때처럼 김태준은 명륜학원에서 강의하고 있었다. 그는 그날 홍길동전이며 춘향전이며 구운몽이며 고전을 들먹거리다가 울분이 격해졌다. 고전 강의조차도 일본어로 하자니 참담한 심정이었다. <14쪽>
사실 한글 창제 원리는 오랫동안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학자들도 저마다 이론이 달랐고 일반 사람들도 나름대로 왈가왈부하고 있었다. 정음의 탄생 기록, 즉 구체적으로 뒷받침할 호적 같은 게 없었기에 사람들은 뿌리 없이 세상에 태어난 서자 취급을 했다. <17~18쪽>
“후대에 우리가 어찌 고개를 들 수 있겠소.”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하듯 그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각이 투철했다. 자신이 수집하고 있는 문화재들이 언젠가 우리의 고유한 정신을 되찾을 수 있게 하리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해례본을 찾아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고 가장 시급하다고 믿고 있었다. <19쪽>
고향에 다녀온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러나 나라가 사라진 조선인에겐 고향은 작은 것에 속했다. 나라 땅이 없는데 내 작은 뜰이 무슨 소용 있으리, 하고 푸념하다가 별안간 다른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교차되었다. <23쪽>
“으뜸이 되는 목청소리는 목구멍 깊숙한 곳이니 깊고 윤택하고 허하고 통한다고 했소이다.”
다른 이가 시조를 읊듯이 느릿느릿 대꾸했다.
“과연 유유히 흐르는 물과 같고 봄을 준비하는 겨울의 깊음이구려.” <33쪽>
“어금닛소리는 어금니를 꾹 깨물 때의 느낌처럼 착잡하고 길어서 소리가 야무지고 실하오. 물 위에 자라는 나무요, 겨울 다음에 오는 봄이요, 봄을 부르는 동쪽이요, 음악으로는 각음角音이라오.”
‘어금닛소리?’
이팔삼은 고개를 갸웃했다. <36쪽>
검은 먹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먹을 머금고 거뭇거뭇해진 붓끝이 떨렸다. 숨을 죽이고 기다리는 한지 위로 가만가만히 형상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42~43쪽>
떠나기 전에 누군가에게 꼭 절을 하고 싶었다. 사실 그는 모든 곳에다 절을 하고 싶었다. 이 고요한 안동의 땅에, 가문의 더없는 헌신에, 알 수 없는 시간의 신비에, 심지어는 억압과 적의에 찬 사건에도 절을 하고 감사의 예를 올리고 싶었다. <49쪽>
그때부터 호랑이 외침은 ᅟᅳᆼᅟᅳᆼ 속에 머물러 있었다. 호랑이들이 ᅟᅳᆼᅟᅳᆼ 울부짖다 하루하루 죽어 갔다. 노란 털과 술에 취한 듯한 눈동자와 맹렬한 기세를 가진, 오래오래 이 땅에 살아온 토종의 무리들이. <54쪽>
그 사랑의 마법으로 나 여기 아직도 살아 있다. 허깨비 망령들이 나를 흔들어 댈지언정 지상에 도착했던 최초의 순간부터 여전히 숨 쉬고 있다. 내 이름은 암클. <68쪽>
『소설 해례본을 찾아서』
주수자 지음 | 달아실 펴냄 | 212쪽 | 15,000원
[정리=이자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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