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2025년, 전 세계가 주목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해, 한국은 문화예술을 통해 자국의 정체성과 가치를 다시 한 번 드러내고 있다. 그 중심에는 국립정동극장이 선보이는 K-컬처시리즈 ‘단심(單沈)’이 있다. ‘단심’은 단순한 공연을 넘어, 전통예술이 오늘날의 시대와 어떻게 호흡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문화적 응답이다.
‘심청전’이라는 익숙한 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심청’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 사회에 오래도록 자리한 ‘희생’의 미학을 다시 묻는다. 부모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효녀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미덕으로 소비되어 왔지만, 이 작품에서의 심청은 스스로의 감정과 갈등을 마주하며 한 인간으로서 주체적 고민을 겪는다. 전통 설화 속 인물이 전통을 넘어 개인과 사회, 존재와 선택이라는 보편적 질문 앞에 서게 되는 순간, ‘단심’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이러한 메시지는 시대적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주체성과 자율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는 오늘날, 과거의 미덕은 비판적 재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단심’은 이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한국 전통예술이 단지 계승의 대상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살아있는 예술임을 증명한다.
무대 연출과 시노그라피를 맡은 정구호는 절제된 조형 감각과 미니멀한 무대 위에 기술적 상상력을 더해, 동시대 관객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미감을 제공한다. LED 영상으로 구현된 바다와 환상 세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심청의 내면세계를 시각화한 공간이자 감정의 비유로 작동한다. 여기에 정혜진 안무가는 한국 전통춤의 형식미를 보존하면서도, 인물 간 감정의 긴장과 서사를 전통의 몸짓으로 풀어내며 시대와 감각의 균형을 완성한다.
작품은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국적 미의식을 세계적 언어로 번역한다. 아니리와 군무, 영상과 조명이 어우러진 이 복합적 서사는 관객으로 하여금 한국 고유의 정서를 체험하게 하면서도, 보편적 감정에 공감하게 만든다. 특히 혼례 장면에서 사용된 복식은 전통의 미적 유산을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한 대표적 사례로, 문화적 유산을 동시대적 감수성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의 의미를 보여준다.
공연은 문화정책과 외교적 전략의 지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국립정동극장은 K-컬처시리즈를 통해 전통예술의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으며, ‘단심’은 그 두 번째 성과로 APEC 특별공연이라는 국제적 무대에 오르게 됐다. 앞서 일본 오사카 엑스포, 대만 운문극장 등에서의 성공적인 해외 무대를 바탕으로, 한국 전통예술이 세계와의 접점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작품이 보여주는 핵심은 바로 "전통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살아 있는 감각으로 번역할 때 비로소 문화가 된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는 오랜 시간 동안 집단을 위한 개인의 헌신과 희생을 미화해왔고, 그 바탕에는 효와 충 같은 전통적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단심’은 이러한 가치에 대한 맹목적 동조가 아닌, 성찰과 재해석을 통해 전통을 갱신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단심’이 문화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한국 전통예술이 가진 형식과 정신을 시대의 언어로 풀어내며 관객과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은 전통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그 정수를 살려 현재에 호흡하는 창작으로 완성되었다. 또한 한국 고유의 미학과 예술성이 한 국가의 문화 정체성을 넘어, 세계 보편의 정서와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2025년의 한국이 세계에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단지 기술과 경제력만이 아니다. 수천 년에 걸쳐 쌓여온 문화적 깊이와 예술적 감수성 역시 중요한 자산이다. ‘단심’은 바로 그 정신적 유산을 오늘의 예술 언어로 되살려낸 하나의 결과물이며, 한국 전통예술의 미래가 단절이 아니라 재창조의 흐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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