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삶의 질 향상과 저출산 해소를 이유로 주 4.5일제 도입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실제 경제 현장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한국은 여전히 OECD 평균보다 긴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지만 동시에 노동생산성은 주요 선진국에 크게 뒤처져 있는 상황이다. 생산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근로시간만 줄일 경우 기업의 부담은 커지고 고용 위축과 경제 성장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해외에서도 주 4일제를 도입했다가 오히려 실패한 사례가 적지 않았던 만큼 전문가들 사이에선 현실적으로 주 4.5일제 도입을 위해선 노동시장 구조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금 체계부터 업종별 특성을 반영할 수 있는 유연 근무제, 기술 혁신과 교육 훈련을 통한 생산성 제고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주 4.5일제는 정책적 상징에 그칠 위험이 크다는 지적이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주 5일제 도입 당시와 달라진 현실
한국은 이미 2000년대 초반 주 5일제를 경험한 바 있다. 당시에는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고용 확대라는 분명한 정책 목표와 함께 정부, 노동계, 기업, 학계 등 다양한 주체가 참여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됐다. 단계적 시행과 공공부문 시범 적용, 법·제도적 정비가 병행되면서 2011년 전면 시행으로 이어졌다. 초기 혼선과 비용 부담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합의와 점진적 접근 덕분에 제도가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주 4.5일제 논의는 이와 대비된다. '삶의 질 향상'이라는 추상적 가치가 강조되지만 제도가 산업 전반에 미칠 파급효과에 대한 구체적 검토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OECD 통계상 2022년 한국의 연간 평균 실근로시간은 1901시간으로 OECD 평균(1752시간)보다 길지만 자영업 비중이 높고 시간제 근로자 비중이 낮은 한국의 구조적 특성은 반영되지 않았다. 단순 수치만을 근거로 도입 필요성을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다.
생산성은 낮아지고 있는데 임금만 오르고 있다는 점도 우려를 사는 대목이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2000~2017년까지는 임금과 노동생산성이 비슷한 속도로 증가했지만 2018년 이후 임금은 연평균 4.0% 상승한 반면 노동생산성은 연평균 1.7% 증가에 그쳤다.
특히 제조업에서 괴리가 두드러졌고, 노동집약적 기업의 수익성은 급격히 악화됐다. 이미 임금 부담이 생산성 증가 속도를 앞지르는 구조에서 근로시간을 줄이면 기업은 인건비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고용을 줄이거나 임금을 삭감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소비 위축과 경기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해외에서도 무리하게 주 4일제를 도입하다 실패한 사례를 엿볼 수 있다. 스웨덴 예테보리시는 공공 병원과 요양원에서 주 4일제를 시범 운영했지만 인력 충원으로 인한 연간 60만유로의 추가 비용 부담으로 제도를 철회했다. 일본 마이크로소프트는 2019년 한 달간 주 4일제를 시범 운영해 생산성 향상과 직원 만족도 개선을 경험했지만, 장기간 유지에는 실패했다.
영국에서는 다양한 업종의 기업이 참여했으나 고객 응대와 생산성 문제, 인건비 부담으로 상당수가 다시 주 5일제로 복귀했다. 스페인 통신사 텔레포니카의 경우 임금을 15% 삭감하는 조건으로 도입했으나 참여율은 0.75%에 불과했다.
해외 선진국에서도 주 4일제나 4.5일제가 제도화되기보다는 단기 이벤트에 그친 셈이다. 생산성이 낮고 기업 경쟁력이 취약한 구조에서는 성급하게 4.5일제를 도입했다가 오히려 부정적 효과가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경직된 노동구조선 주 4.5일제 한계 뚜렷…노동시장 유연성 확보가 선행 과제
상황이 이렇다보니 노동시간 단축 자체는 근로자의 삶의 질 개선에 기여할 수 있지만 이를 곧바로 제도화할 경우 한국 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인력 운용이 빠듯한 중소기업과 교대 근무가 필수적인 제조업은 근로시간 단축이 곧바로 생산 차질과 비용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임금 상승률이 생산성을 웃도는 상황에서 인력 충원이 불가피하다면 기업의 경쟁력은 급속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는 고용 축소와 청년층 일자리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제도의 취지가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현실적인 해법으로는 노동시장 유연성 확대가 거론된다. 선택근로제, 탄력근로제, 재택·하이브리드 근무 등 다양한 유연 근무제가 이미 제도적으로 마련돼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규제와 제도적 제약으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획일적인 주 4.5일제 도입보다 각 업종과 기업의 상황에 맞게 근로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 먼저라고 지적했다. 근로자의 선택권을 보장하면서도 기업의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보다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설명이다. 임금 상승과 생산성 정체가 이어지는 구조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기업의 수익성 악화로 직결된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노동집약적 업종에서 그 충격이 큰 만큼 제조업 중심의 한국 경제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임금과 생산성 간 괴리가 확대될수록 고용은 줄고 경제 전반의 성장 잠재력이 위축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급한 주 4.5일제 도입보다는 노동생산성 제고와 성과 연동형 임금체계 정비, 규제 완화 등과 같은 구조적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치권에서는 제도 도입을 저출산 해소나 삶의 질 향상의 해법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다르다. 중소기업 경영자들은 임금 삭감 없는 단축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반발하고 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줄어든 시간 안에 같은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이 오히려 스트레스를 키울 수 있다는 불안이 나온다. 근로일 단축이 삶의 질을 높이기는커녕 업무 강도와 불안정성을 키울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대종 세종대 교수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고려할 때 주 4.5일제는 삶의 질 향상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보다 오히려 기업 부담과 고용 위축을 초래할 수 있다"며 "현실적으로 주 4.5일제가 안착하려면 충분한 준비와 사회적 합의, 그리고 무엇보다 생산성과 유연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구조 개혁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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