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생활가전이 반도체 경쟁 무대의 장이 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비스포크 AI 라인업에 고성능 AI 칩을 탑재, LG전자는 전용 칩 ‘DQ-C’를 앞세워 세탁기·건조기·에어컨으로 제품군을 확대하고 있다. 온디바이스 AI로의 전환이 소비자 경험과 공급망 전략을 흔드는 가운데 냉장고·세탁기·로봇청소기 등 생활가전에서 AI 연산 능력이 성능을 가르는 핵심 지표로 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시장조사업체 그랜드뷰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온디바이스 AI 시장은 2024년 약 8억6000만달러에서 2030년 36억6000만달러 규모로 성장, 연평균 성장률은 27%를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가전 내 AI 기능 탑재율도 향후 꾸준히 확대되면서 프리미엄 제품 경쟁 구도의 핵심 변수가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온디바이스 AI는 클라우드 서버에 의존하지 않고 기기 내부 칩에서 데이터를 직접 처리하는 기술이다. 네트워크를 거치지 않아 응답 지연이 크게 줄고, 즉각적 서비스 제공이 가능하다. 데이터가 외부로 전송되지 않기 때문에 보안성과 개인정보 보호 측면에서도 유리하다. 삼성, 애플, 구글 등 글로벌 ICT 기업들이 온디바이스 AI를 차세대 전략 축으로 삼는 배경이다.
삼성전자는 칩 내재화를, LG전자는 플랫폼 연동을 앞세우며 AI칩 전략에서 노선을 달리하고 있다. 지난 3월 삼성전자는 CES 2025에서 냉장고·세탁기·정수기·로봇청소기를 아우르는 ‘비스포크 AI’ 라인업을 공개, 전략 전환을 분명히 했다. 기기 내부에서 연산하는 온디바이스 알고리즘을 확대해 자율 제어 기능을 강화, AI Energy 모드로 사용 패턴을 학습해 전력 소비를 최대 10%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단순한 성능 개선을 넘어 모든 가전을 연결하는 ‘AI Home’ 비전도 내세웠다. 생활 데이터를 기반으로 가전을 플랫폼으로 확장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자체 최적화한 신경망처리장치(NPU)를 가전에 적용, 반도체 사업과의 시너지를 노리고 스마트싱스(SmartThings) 연동으로 기기 간 데이터를 실시간 공유해 에너지 관리와 보안까지 통합 제어하는 기능을 강조했다.
LG전자는 지난해 7월 자체 개발한 가전 전용 AI칩 ‘DQ-C’를 발표했다. 세탁기·건조기·에어컨 등 5개 제품군에 적용, 8개 제품군 46개 모델로 확대할 계획이다. 3년 이상 연구 끝에 완성된 이 칩은 기기 스스로 사용 패턴을 학습해 맞춤형 제어를 지원하는 온디바이스 AI 기술로 LG 프리미엄 전략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ThinQ 플랫폼과 연동해 초개인화 서비스를 구현, 차세대 경쟁력으로 끌어올릴 방침이다.
AI칩 도입은 생활가전의 설계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으로 풀이된다. 그동안 모터 성능과 센서 정밀도가 경쟁의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AI칩과 알고리즘 역량이 성능 격차를 좌우하고 있다. 때문에 가전 업체들도 단순 하드웨어를 넘어 반도체 설계와 고급 패키징 기술까지 고려해야 하는 국면에 들어섰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문제는 이런 기술 전환이 공급망 리스크와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2021년 차량용 반도체 부족으로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생산 중단과 기능 축소에 나선 사례는 수급 불안이 가전업계에도 그대로 전이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2021년 전 세계 자동차 생산량은 770만 대 이상 줄어든 것으로 집계, 칩 내재화 여부가 향후 공급 안정성과 플랫폼 경쟁력을 가르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AI칩은 생활가전의 사용자 경험을 바꾸는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기존 스마트가전이 클라우드 연동을 통한 원격 제어나 음성 명령에 의존했다면 온디바이스 AI는 기기 내부 칩에서 데이터를 실시간 처리해 지연 없는 제어가 가능하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각각 에너지 절감·맞춤 세탁 코스 등 기능을 앞세운 것도 같은 맥락으로 진단된다.
삼성전자는 AI 세탁기에 세제 투입량·코스 자동 조정 기능을, 냉장고에는 사용 패턴을 학습해 전력 소비를 최대 10% 절감하는 AI 에너지 모드를 탑재했다. LG전자는 자체 칩 ‘DQ-C’를 적용한 세탁기로 의류 종류와 오염도를 분석해 맞춤형 코스를 제안한다. 이렇게 축적된 데이터는 헬스케어, 에너지 관리, 구독형 서비스로 확장되며 가전 기업의 수익 모델을 바꿀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반도체 분야 대학교수는 “온디바이스 AI는 세트 기업이 주도해야 할 영역으로 향후 4~5년 내 양산 시대를 열어야 한다”며 “자동차와 가전 등 제조 기반이 탄탄한 한국에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가전업계 관계자는 “브랜드 가치 원천은 더 이상 모터나 센서 성능에 있지 않다”며 “앞으로는 칩과 알고리즘 역량이 가전 경쟁력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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