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한 사람의 그림 이야기 - 여행자, 베로나에서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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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사람의 그림 이야기 - 여행자, 베로나에서①

문화매거진 2025-05-30 00:04:54 신고

▲ 여행자, 베로나에서 / 그림: 김태이
▲ 여행자, 베로나에서 / 그림: 김태이


[문화매거진=김태이 작가] 2025년 4월, 나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베로나에 머물고 있었다. 유럽이라는 넓은 대륙 안에서, 수많은 나라와 도시들 가운데 왜 하필 이탈리아였으며, 그중에서도 베로나였을까. 바로 몇 달 전 생이별을 했던 동생이 그곳에 살고 있었기에, 단순히 숙박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긴 시간 동안 벗어날 수 없었던 하나의 프로젝트를 마친 직후, 정신없이 달려왔던 날들이 끝나자 문득 나 자신이 얼마나 칙칙해지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책상 앞에서만 지내 온 시간 속에서 나는 어느새 내 삶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내가 모르는 내가 잊고 살았던 것들이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듯했다. 나는 그것들을 기어이 찾아내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사는데 문제없는 짐만 꾸려 익숙하지 않은 언어와 공기들로 가득 찬 베로나로 향했다. 단지 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도시의 골목과 햇살... 그리고 조용한 오후 속에 숨어 있는 나 자신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되찾고 싶어서였다.

사실 돌이켜보면 대학생 시절 잠시 폴란드의 예술대학에서 공부했던 시간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여행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 비행기 티켓을 검색하고 예약하는 일부터, 낯선 도시의 지도를 펼쳐 들고 숙소와 열차 시간을 계산해가며 하루하루의 일정을 세우는 것까지.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오롯이 나 혼자 결정하고 움직이는 경험은 익숙한 일상 속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었다.

그래서였는지, 그런 모든 ‘처음’이 모여 만들어낸 베로나라는 도시는 모든 선험적 감각에서 벗어나 있었다. 마치 그곳 어딘가에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무언가가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처음 마주한 베로나의 아레나는 아직 꺼지지 않은 밤 불빛을 머금은 채 광장 위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고, 천천히 내가 있는 곳으로 내려 닿았다. 멍하니 눈을 떼지 못한 채로, 구글 맵이 켜진 핸드폰을 든 손은 떨구어졌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뭉그스름하게 멀어졌다. 지금이 내가 어떤 순간인지 알아차릴 수 있게 조금만 더 내게 오래 머물렀으면 했다. 놀랍게도 난 이 순간 사진을 찍으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천천히 단어들을 더듬으며 내 안에 제대로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카메라의 렌즈보다 내 눈이 좀 더 나를 잘 기억했길 바랄 뿐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어떤 순간을 지나고 있었다.

너는 그 여행이 행복했었어? 누군가 묻는다면 조금 망설이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세세하게 계획했지만 그 어느 것도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락함이나 편안함과는 분명히 거리가 먼 삶이었다. 낯선 동양인을 물에 뜬 기름처럼 밀어내는 눈빛들도 그 여성을 더욱 움츠러들게 하는 소리들도. 

그렇지만 내가 언젠가 반드시 깨달아야 했던 것을 여기서 갖고 가는 것은 분명하다. 인생의 과업, 내가 착각하는 고통들로부터의 해방. 내가 진짜로 감당해야 할 것들과 그저 착각 속에서 짊어지고 있던 고통들 사이를 분명히 구분 지을 수 있는 어떤 단서. 한국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평범한 오후에, 집 근처 산책길을 걷다가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출국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숨을 쉬고 있는 듯했다. 

잔잔한 물기 머금은 여름이 오고 있다. 한 계절을 건너뛰고, 아직 익지 않은 감정들을 품은 채로 갑작스레 도착한 어떤 격렬한 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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