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최소라 기자] ‘밸류업 프로그램’ 시행 이후, 국내 주요 상장사들이 앞다퉈 자사주 소각에 나서고 있다. 주가 부양 및 주주가치 제고가 강조되는 가운데, 정치권에서도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대응에 나선 모습이다. 자사주 소각은 보유 주식을 없애 유통 주식 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기존 주주 가치를 실질적으로 높이는 주주환원 수단으로 평가된다.
28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상장사의 자사주 매입은 18조8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2.4배, 자사주 소각은 13조9000억원으로 2.3배 증가했다. 올해 들어서는 불과 5개월 만에 소각 금액이 15조원을 돌파하며 작년 연간 실적을 초과했다. 특히 코스피 대형주를 중심으로 자사주 소각이 빠르게 확산 중이다.
◇자사주 소각, 5개월 만에 15조 돌파…작년 실적 초과
자사주는 기업이 자사 명의로 보유한 자사 발행 주식으로, 보통 기업이 잉여 자금을 활용하거나 주가 방어를 위해 매입한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보유하기만 할 경우, 대주주의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비판도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자사주를 매입한 뒤 이를 즉시 소각해 주주 이익으로 환원하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한국거래소는 “밸류업 프로그램 시행 이후, 상장사들의 자사주 활용 방식에 실질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삼성전자·KB금융·고려아연 등 선도적 참여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 동안만 약 5조5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소각할 계획이다. 지난 2월, 보통주 5014만 주와 우선주 691만주 등 약 3조원 규모의 자사주 소각을 단행한 데 이어, 매입한 자사주 중 2조5000억원어치 추가 소각도 예고했다.
KB금융은 자사주 소각을 통해 금융권 내 독자적 밸류업 전략을 실현 중이다. 지난해 하반기 매입한 자기주식 566만주(약 5000억원)와 올해 2월부터 매입한 640만주(약 5200억원)를 최근 동시 소각했다. KB금융 관계자는 “올해는 밸류업 공시 이행 원년으로, 독자적 프레임워크를 기반으로 주주가치 제고에 속도를 낼 것”이라고 밝혔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적대적 M&A 방어를 위해 취득한 자사주를 올해 내 전량 소각하기로 결의했다. 회사 관계자는 “주주와의 약속을 이행하고, 지속적으로 주주환원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메리츠금융지주는 지난 3월 5000억원 규모 자사주 소각을 결정했으며, 한미반도체는 전체 주식의 1.35%인 약 1300억원어치 소각을 공시했다.
◇이재명 “자사주 원칙적 소각 제도화할 것”
정치권에서도 자사주 소각을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상장회사의 자사주는 원칙적으로 소각해 주주 이익으로 환원되도록 하겠다”고 공약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그간 자사주 매입만 하고 소각은 미뤄왔던 국내 기업 관행에 변화가 필요하다”며 “단순 매입이 아닌 의무적 소각까지 제도화돼야 주주환원 효과가 발생한다”고 밝혔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도 지난 4월 22일, 기존 보유분의 즉시 소각 및 향후 매입분 3개월 내 소각 등 의무화를 주장하며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이들은 “선진국은 자사주 매입과 동시에 소각이 이뤄지므로 자사주가 재무상태표에 아예 계상되지 않는다”며, 자사주가 경영권 방어 수단이 되는 현실을 비판했다.
◇“지배구조 개선과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기대”
정의정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 대표는 “국내 기업은 그간 지배주주 중심의 구조 속에서 자사주 소각이 매우 소극적이었다”며 “최근 확대되는 소각 흐름은 주주가치 제고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인 신호”라고 평가했다.
다만 정 대표는 “매입 즉시 소각 등 지나치게 경직된 의무화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며, 각 기업의 재무 여건과 경영 전략을 고려한 유연한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한국거래소는 밸류업 프로그램 1주년을 맞아 기업가치 제고 성과가 우수한 상장사 10곳을 선정해 시상했다. HD현대일렉트릭과 KB금융이 경제부총리상을, 메리츠금융지주·삼양식품·KT&G는 금융위원장상을, 삼성화재·신한지주·현대글로비스·KT·SK하이닉스는 거래소 이사장상을 각각 수상했다.
정은보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밸류업 프로그램 시행 이후, 코스피 시가총액의 절반(49%)에 해당하는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공시에 참여해 주주환원과 지배구조 개선 측면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자사주 소각이 일시적 흐름에 그칠지, 제도 개편과 맞물려 지속 가능한 기업가치 제고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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