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한미 양국 간 진행 중인 통상 협상이 다시 민감한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최근 미국이 한국의 '비관세 장벽'을 정면으로 문제 삼으며, 자국산 농축산물 수출 확대를 위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쇠고기 수입 규제 완화와 유전자변형식품(GMO, 한국 기준 LMO) 승인 절차 간소화를 요구하는 데 이어, 쌀 관세 문제까지 거론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26일 정부 관계자 등에 따르면 이번 갈등은 지난 5월 20일부터 22일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장급 실무협의에서 더욱 선명히 드러났다. 미국은 자국의 연례 '국가별 무역장벽 보고서(NTE 보고서)'를 근거로 한국의 식품안전 및 검역 조치를 '비합리적 규제'로 지적하며, 철폐 혹은 완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실무 논의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내용은 사실상 '규제 철폐' 요구의 서막이라는 평가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미국이 특정 사안을 언급하며 사실상 문제를 공식화했다"며 "아직 협상 단계는 아니지만, 분명한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실무협의에서 미국 측이 가장 강하게 문제 삼은 사안은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금지 조치다. 2008년 광우병 파동을 계기로 한국은 30개월령 미만의 미국산 쇠고기만 수입하는 '과도기적 조치'를 취했지만, 이 합의가 16년째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은 심각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올해 발표한 NTE 보고서에서 "과도기 조치가 실질적으로 영구적 수입 제한으로 변질됐다"며 "이는 합의 정신을 훼손하고, 미국산 제품의 한국 시장 접근을 제약하는 조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쇠고기 가공품—분쇄 패티, 육포, 소시지 등—의 수입 제한도 같은 맥락에서 "과학적 근거 부족"을 이유로 철폐 대상에 포함시켰다.
정부는 국내 소비자 안전과 여론을 고려한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해명하고 있으나, 미국은 "한국이 과학이 아닌 정서에 근거해 수입을 제한하고 있다"고 맞서고 있어 향후 협상에서 가장 민감한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변형생물체(LMO, Living Modified Organism)에 대한 미국의 문제 제기도 갈수록 본격화되고 있다. 현재 한국은 농림축산식품부, 환경부, 해양수산부, 식품의약품안전처, 산업통상자원부 등 최소 다섯 개 부처에서 각각의 승인 절차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시스템이 과도하게 복잡하고, 행정적 비효율을 초래한다는 입장이다.
NTE 보고서는 "부처별로 요구하는 데이터 형식이 달라 동일한 정보를 여러 차례 제출해야 한다"며 "심사 기간도 일정하지 않아 예측 가능한 통관이 어렵다"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LMO 승인 구조를 단일화하거나, 간소화된 통합 심사 체계를 도입할 것을 한국에 요구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각 부처의 전문성과 관할 권한을 기반으로 한 다층적 심사 체계가 안전성을 담보하는 제도라며 반박하고 있으나, 미국 측은 이를 '비관세 장벽'의 전형으로 간주하고 있다. 특히 바이오산업 및 농산물 유통을 선도하고 있는 미국 기업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향후 양국 간 갈등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농축산물 갈등의 불씨는 전직 미국 대통령의 입을 통해 다시 확산될 조짐도 보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선거 유세 중 "한국은 미국산 쌀에 500%가 넘는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며 "이건 불공정 무역의 대표 사례"라고 직격했다.
한국은 현재 저율관세할당(TRQ) 내 물량인 연간 13만여 톤에 대해선 5% 관세를 적용하지만, 이 외 물량에 대해선 최대 513%의 고율 관세를 매기고 있다. 이는 자국 농민 보호를 위한 조치지만, 미국은 이를 '과도한 보호주의'로 보고 협상 테이블에 올릴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가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복귀하면서 한층 강경한 무역정책을 예고한 것도 한국에는 부담 요인이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의 기조 아래, 통상 압박이 강화될 경우 농업 분야가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이번 주 중 관계 부처 합동 대책회의를 열고 미국 측의 요구 사항에 대한 검토에 착수할 계획이다. 특히 쇠고기와 GMO, 쌀 등은 국내 소비자 여론과 직결되는 사안이라 정부로서는 민감한 외줄타기를 피할 수 없다.
결국 협상의 상대는 미국 정부지만 결단은 한국의 몫이다. 검역 주권과 소비자 안전, 통상 환경을 둘러싼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정부는 국민 식탁의 안전성과 경제적 실익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다.
Copyright ⓒ 폴리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