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언어는 자기 안에 철학적 요소를 품고 있습니다. 어떤 단어는 단어 자체만으로 풍성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언어학자인 '벤저민 리 워프'는 "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나의 가치관, 내 삶의 지향점을 보여줍니다. 주요국 언어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통해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들여다봅니다.
가장 먼저, 내가 좋아하는 한국어는 <살림>입니다.
결혼을 하면 살림을 차린다고 하지요. 살림은 '살다'에서 피동 접미사인 '리'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 살다(live)+리 ='살리다' 에서 <살림>이 나왔지요.
여기에선 <리>가 중요합니다. 영어의 삶인 'life'는 나만 살면 되지만, 우리 말의 <살림>은 내가 땀 흘리고 노력할 대상(타인)을 필요로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살리고 자식이 부모를 살리고, 아내가 남편을 살리고 남편이 아내를 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저 사람과 살면 어떤 이익이 되리라 생각하고 결혼을 하면 역설적으로 삶은 더 힘들어집니다. 덕을 보려는 마음이 예상치 못하게 손해볼 때마다 배우자에게 실망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한 원인이 됩니다. 내가 손해봐도 괜찮다는 사람이랑 사는 게 결혼입니다. 그래서 살림이지요.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모든 평범한 존재는 관계와 살림의 힘을 통해 비범해집니다. 마음 속에 '나'만 살고 있는 사람과 '남'이 사는 사람은 다릅니다. 어머니의 마음 속엔 자신보다 자식을 위한 모성과 헌신이 있기에 위대한 것입니다.
두번째, 일본어 중에는 <고모레비 木漏れ日>라는 단어를 가장 좋아합니다. '나무 사이에 스며드는 햇살. 그리고 그 햇살을 바라보며 느끼는 행복'이라는 뜻이지요. 이 단어를 생각하면 느낌으로만 인식되는 행복이라는 단어에 피가 돌고 살이 돌게 합니다. 나무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주는 평온함, 아주 작은 곳에서 행복을 감지하는 섬세한 태도를 가진 안테나같은 단어여서 더 좋습니다.
세번째,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일어는 <파이어아벤트> Feierabend입니다. 이진민 작가의 글로 알게 되었습니다. '파이어아벤트'는 작은 축제나 파티를 뜻하는 '파이어 feier' 와 저녁을 말하는 '아벤트 abend'가 합쳐진 말입니다.
퇴근 후 가족들과 맥주잔을 기울이며 저녁을 보낼 것 같은 느낌을 가진 단어입니다. '작은 축제를 선포'하며 직장문을 나서는 독일인들, 우리의 '퇴근'이란 단어가 주는 칙칙함과 피곤함이라는 색감과는 정반대입니다. 독일은 일상을 즐기고 휴식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아르바이트라는 단어처럼 엄격한 독일인들에게 이런 멋진 단어가 있다니, 두 번 놀랐습니다.
2025년 트렌드 중 '아보하'와 비슷한 개념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보하는 '아주 보통의 하루'라는 의미로, 우리는 이전에 '소확행'이라는 트렌드에 심취해 나의 하루를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집중하려고 했지요. 소小확행이 어느새 점점 커져 중中확행이 되더니 점차 남에게 잘 보이려는 과시로 변질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사회도 무난하고 무탈한 일상을 가치있게 여기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행복담론이 바뀌고 있는 것이지요.
특별한 무엇이 생기지 않더라도 '그저 그런 하루', 보통의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소중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 현재가 가장 소중하며 그 시간을 무탈하게 잘 보내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입니다.
탄핵정국으로 정치가 일상을 지배한 지난 100여일을 겪어보니 어떠했습니까? 우리 사회에 유머와 일상이 사라지고, 과정 하나 하나마다 삐걱거리며 갈등이 분출했습니다. 좋은 정치는 세상을 심심하고 소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책도 보고 친구와 영화도 보고 야구장도 가고, 또한 지인들을 편하게 만나 시시껄렁한 대화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찾는 행복이란 아무 것도 아닌 하루, 마음을 졸이거나 고민거리조차 없이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어쩌면 지루할 것 같은 하루, 그것이 점점 소중하고 행복한 하루가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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