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서원 작가] 오늘날 전시는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문화 행위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공 전시의 개념은 매우 근대적인 산물이며, 특정한 사회적 구조와 시각의 훈련 과정을 통해 성립되었다. 조선시대까지의 미술문화는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전시문화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당시의 그림이나 공예품은 왕실의 장식품이거나 사대부 사회의 교양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다수에게 공개하고 감상시키는 것은 고려되지 않았다.
미술은 사적 소장과 감상의 대상으로, 권위와 교양을 상징하는 한정된 소통의 매개였다. 이는 사회 전체가 신분제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문화 소비 또한 폐쇄적인 구조 안에 머물러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공의 시선을 상정하지 않은 감상 구조는 계급질서 유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근대에 들어와 이 구조는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변화의 핵심에는 박람회라는 장치가 있었다. 19세기 중엽 서구에서 시작된 만국박람회는 산업 발전을 선전하는 장이었지만, 동시에 근대적 시선을 훈련시키는 공간이었다. 사물은 질서 있게 분류되고, 비교를 통해 우열이 가려졌다. 관람자는 정해진 동선을 따라 이동하며 체계적 배열 속에서 전시물을 감상하도록 유도되었다. 이는 무심한 감상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 판단을 내리도록 설계된 감상이었다.
조선에서도 이러한 박람회 문화가 도입된다. 1907년 경성박람회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는 조선 사회에 처음으로 근대적 전시문화를 이식했다. 이 과정에서 ‘동양화’, ‘서양화’, ‘조각’과 같은 서구적 장르 구분이 도입되었고, 미술품은 산업품과 나란히 전시되었다. 감상자는 사물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진보와 낙후, 문명과 미개라는 비교의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박람회가 시선을 훈련시키는 일회적 경험이었다면, 박물관은 이를 제도화하는 공간이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은 경복궁 안에 세워졌고, 유물들은 철저한 분류와 해설을 통해 전시되었다. 유물은 과거의 사물이 아니라, 특정한 해석을 내포한 문화재로 재구성되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유물은 조선의 찬란한 고대를 상징하는 반면, 조선시대 유물은 상대적으로 열등하거나 정체된 문명으로 묘사되었다. 이 배열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특정한 역사 인식을 시각적으로 강화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Copyright ⓒ 문화매거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