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 'ㅐ'와 'ㅔ' 발음
'ㅐ'를 'ㅔ'처럼, 'ㅔ'를 'ㅐ'처럼 발음하는 경향이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심각하다. 이 두 모음을 바르게 구분해 발음하는 것이야말로 정확하고 명료한 발음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사실 좋은 발음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모음의 음가(音價)를 정확히 내는 꾸준한 훈련이 필수다. 언제부턴가 입 주위 근육을 너무 안 쓴 탓에 모음을 제대로 발음하는 연습을 할라치면 흠칫 놀라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입을 크게 벌려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답은 명백하다.
그렇다!
모음 훈련은 단언컨대 자신의 상상과 상식을 뛰어넘는 입 벌리기의 체화가 관건이다. 'ㅐ'는 치과에 갔다 상정하고 'ㅏ' 하며 입을 크게 벌리고는 그 상태에서 'ㅐ'를 만들면 가능하다.
더 간편한 방법은 입을 벌려 손가락 검지와 중지를 가로 형태로 가볍게 넣은 다음 'ㅐ' 하면 입 모양이 만들어진다. 이때 입 모양의 좌우 형태에 신경을 많이 쓰곤 하는데 상하(上下)의 벌림이 더 중요하다.
'대다'와 '데다', '매다'와 '메다', '배다'와 '베다', '새다'와 '세다'를 발음부터 의미까지 모두 구별하는 이를 본 일이 드물다.
'제일'(第一)과 '재일'(在日), '체증'(滯症)과 '채증'(採證) 같은 한자어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너희들이 게 맛을 알아?"라는 유행어를 낳은 햄버거 광고를 기억하는가?
'게'가 '개로 들리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었다. 그 이전 경험은 더하다. 웬만한 장년층이라면 아련한 향수와 함께 떠오르는 노래, '메기의 추억'이 있다.
앵글로색슨 냄새 가득한 그 이름 '매기'(Maggy, Maggie: Margaret의 애칭)를 그리워하는 내용의 한 미국 노래가 어느 발음 문외한의 손에 의해 '메기'로 표기되는 바람에, 적지 않은 국민들이 민물고기 메기를 뜬금없이 추억의 아이콘으로 소환해 매운탕을 벗했다.
허탈함과 쓴웃음을 넘어 이쯤 되면 블랙코미디 아닌가.
'ㅔ'는 입을 크게 벌린 'ㅐ'에서 혀끝을 한 단계 끌어 올린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수월하다. 그러면 자연스레 턱이 약간 올라가게 된다. 주의할 것은 입 모양을 의식적으로 옆으로 각지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발음이 옹골차진다. 어느 정도 정착될 때까지는 인중에 약간 힘을 주는 것도 요령이다.
'세상'이 [새상]이 되지 않도록, 제주도가 [재주도]처럼 벙벙해지지 않게끔, '네가'가 난데없이 [내가]로 변신하지 못하게 신경 써보자.
◇ 'ㅙ'와 'ㅞ'와 'ㅚ'의 발음
'ㅐ'와 'ㅔ' 관문을 통과하면 'ㅙ'와 'ㅞ'와 'ㅚ'가 기다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요즘의 발음 현상은 'ㅙ'도 'ㅞ'처럼, 'ㅚ'도 'ㅞ'처럼 가고 있어 걱정스럽다.
이중모음 'ㅙ'는 발음의 끝에서 'ㅐ' 입 모양을 크게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하다. 'ㅞ'는 같은 맥락에서 'ㅔ'로 마무리를 짓는다.
문제는 'ㅚ'다. 'ㅚ'는 엄연한 단모음이다. 단모음(單母音)이란 이를테면 단번에 잡스러운 소리 없이 깨끗이 나오는 발음을 뜻한다. 'ㅏ', 'ㅗ', 'ㅣ', 이런 것 말이다.
사달은 "'ㅚ'와 'ㅟ'는 이중모음으로 발음할 수 있다"라는 표준 발음법 제4항 '붙임 해설'에서 비롯됐다.
소리는 나 몰라라, 애오라지 문자에만 매몰된 일부 학자가 발음의 정밀성보다 현실 발음의 편의만을 좇은 결과다.
자기도 'ㅚ' 발음을 힘겨워하던 차에 일반 국민의 수고로움을 덜어준다는 빌미로 무책임하게 대충 얼버무린 것이다. 어려운 발음이 있다면 그것을 제대로 발음하는 방법을 일깨우고 보급할 일이지, 엄연한 단모음의 정체성을 내버리고 유사시에는 이중모음으로 바꿔 발음하라는 것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
이는 외래어 표기법의 정착과도 대척한다. 외래어의 정치(精緻)한 표기를 위해 한국어의 어문·문자 체계와는 거리가 먼 '튜'(튜브), '블'(블라우스), '뷔'(뷔페) 등의 음절을 수용했고 그러한 표기를 통해 한국인의 발음 스펙트럼 확장이라는 뜻밖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ㅚ'만 보더라도 '뢴트겐 검사', '뫼비우스의 띠', '푄 현상'이 오롯한데 'ㅚ' 발음도 되고 'ㅞ'도 된다고 하면 뭐 하러 'ㅚ'로 적으란 말인가?
최소한 어두(語頭)에는 'ㅚ'를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어말(語末)에서는 'ㅞ'를 인정하는 쪽으로 바뤄야 한다는 생각이다. 모국어의 단모음을 반듯하게 구사하려 노력하는 이를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그 의욕을 묻히게 한다? 이건 아니다.
참고로 'ㅟ'와의 형평성을 지적하는 이가 있지만, 'ㅟ'는 우리말 모음에 그 음가를 혼란스럽게 하는 다른 모음이 없어 다행히 문제가 없다.
좋은 음성은 현대인에게 매력적인 경쟁력이다. 그러나 음성은 다분히 선천적인 것이다. 발음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만들면 목소리가 좋은 것으로 인식되는 것 이상의 이미지를 얻는 효과가 있다.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당장 입 주변 근육을 풀고 입을 크게 벌려보자. 가능하면 입안 뒤쪽에서 소리 내는 연습부터 시작하면 된다.
이 황당하고 얼토당토않은 불상사의 이유는 뭘까?
혐의 중 하나는, 신체 언어의 겉멋에 젖은 '고갯짓 연출'의 파국이라고 본다. 의미 요소는 제쳐두고 제멋대로의 호흡에 맞춰 강조점을 찍다 보니 이런 변고(變故)가 터지는 것이다. 영어 등 구미어의 영향도 엿보인다.
일찍부터 외국어 텍스트에 노출되고 중간과 후미를 넘나드는 악센트 서핑에 미혹된 터에, 영미 방송의 현란한 표정 연출이 적이 멋스러워 보여 한국어 뉴스 읽기에 괴이하게 접목한 것 같다고나 할까.
한국어는 억양과 강세가 있긴 해도 그 폭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더구나 공적인 언어 공간에서는 정중어법(鄭重語法)에 대한 암묵지까지 작용하기에 그 정도가 완만해야 정상이며, 그래야 한국어답다.
강약·중강약, 강약약·중강약약, 이 소중하고 빼어난 셈여림을 저버린, 약강식(弱强式)의 삐딱한 엇박자 리듬 탑재는 어불성설이다. 당연히 수용자·시청자는 거북스러운 이물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음의 길이와 강세를 혼동하는 현상도 포착된다. 장음(長音)이라 쓰고 악센트라 읽는 꼴이다.
'사:람[사:람]'이 사람[싸람, 'saram]으로, '화:병(火病)[화:뼝]'이 화병[화뼝]으로 무시로 탈바꿈한다. 장음 구사를 못 하거나 귀찮거나 몰이해한 안타까운 현상이다.
절정의 재앙은 악센트의 뒤바뀜도 모자라 자의적으로 동시에 이루어지는 '장음 강세로의 강제 모드 변환'이 다. 멀티 자책골이라고나 할까?
'아름다운 암굴왕(暗窟王)' 하면 얼추 형용모순에 해당할 것이나 오늘도 HD 화면을 부단히 장식하는 이 '통탄할 읽기'가 소위 인기 앵커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각 방송사의 교육·훈련 기능이 실종된 탓이 가장 크다.
적절하고 효과적이며 근사한 말하기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다. 그러나 그에 앞서 정확하고 아름다운 읽기(리딩)에 대한 관심과 고찰이 필요하다. 기초가 되는 밑절미는 의당 개별 발음의 정밀한 음가 찾기라 할 것이다.
표준문자에 쏟는 에너지와 인프라의 반절만 표준발음 쪽에 투입해도 우리 발음·읽기·말하기가 진일보할 것으로 확신한다. 차제에 한국어의 표준 억양·표준 어조·표준 강세에 대한 파천황(破天荒)적 연구도 기대해본다.
관련 학계의 대가(Guru)들이 의기투합해 불가역적 대세인 읽기·말하기의 노둣돌을 쌓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강성곤 현 KBS 한국어진흥원 운영위원
▲ 전 KBS 아나운서. ▲ 정부언론공동외래어심의위원회 위원 역임. ▲ 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언어특위 위원. ▲ 전 건국대·숙명여대·중앙대·한양대 겸임교수. ▲ 현 가천대 특임교수.
* 더 자세한 내용은 강성곤 위원의 저서 '정확한 말, 세련된 말, 배려의 말', '한국어 발음 실용 소사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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