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 중쇄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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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 중쇄의 기쁨

문화매거진 2025-04-08 09:40:13 신고

▲ 중쇄의 기쁨 / 사진: MIA 제공
▲ 중쇄의 기쁨 / 사진: MIA 제공


[문화매거진=MIA 작가] 작업자로서 살아가는 데 내게 어떤 희망의 싹을 틔워 주었던 책, ‘The blue: bench’(벤치, 슬픔에 관하여) 3쇄를 얼마 전 진행했다. 솔직히 ‘벌써 3쇄라니’와 같은 감격보다는 ‘무사히 잘 끝났다’라는 안도감이 더 크다. 제작할 때마다 이슈가 많았던 책이라, 결과물을 받기 전까지 마음을 놓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1쇄를 진행할 때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하드커버로 제작하는 책 표지에 사용되는 종이가 보드에 어떤 풀을 써도 잘 붙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판권 면은 뒤표지 부분에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했는데, 하필 표지 종이가 미세한 굴곡이 있는 재질이어서 구멍 바깥으로 잉크가 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내지는 또 어떤가. 인쇄하다가 공정 오류로 원래 제작하려던 책 부수 삼분의 일 정도가 줄어들었다. 여러 종이로 테스트 인쇄를 해보고 고른 종이였는데, 하필 먼지가 잘 붙는 성질이어서 인쇄 사고가 났고 그렇게 애써 인쇄한 종이의 상당량을 날려 먹은 것이다.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 제작되었다는 표지와 내지를 막상 받고 보니(이 책의 표지와 내지를 붙이는 작업은 내가 해야 한다) 제작된 표지 수량의 절반 이상 흠집이 나 있어서 결국 일부 수량은 재제작에 들어가야만 했다.

이 책을 재쇄할(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작 과정이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책이 다 팔릴 거라는 가정 자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단기간에 빠르게 소진되어서 그렇게 1쇄를 제작한 지 8개월 만에 2쇄를 진행하게 되었다. 종이 자체가 가진 성질 때문에 어떤 문제들은 여전히 반복되었지만, 그래도 한번 해본 작업은 요령이 생긴다는 인쇄소 담당자님의 말씀을 따라 1쇄보다는 작업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이렇게 차근차근 읊어보는 과정이, 내자마자 20쇄를 넘게 찍는 어떤 책 관련 담당자들에게는 별일 아닌 것처럼 들릴 거라는 생각도 문득 한다. 하지만 독립 출판은, 같은 출판계의 부분 집합일지라도 이럴 땐 아예 장르가 다른 세계의 일로 느껴진다. 작가 외에 책의 생산과 품질 관리, 유통 등의 일을 맡아줄 타인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결정들은 하나하나 크게 다가오고, 작업 목적과 방향을 계속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을 부연하고 싶다.

아무튼 그렇게 2년이 흘러 책 재고가 모두 소진되었고, 당연히 3쇄를 생각하기도 했지만, 꼭 그래야 하는지 몇 번 자문하기도 했다. 그저 관성에 의해 진행되는 일이라면 의문을 가져볼 만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3쇄를 결정하게 만든 일념은 ‘이 책이 계속 나아가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지금 이 책은, 내가 아는 한 이탈리아, 중국, 대만, 네덜란드, 한국, 프랑스, 영국 등지-단 한 권만 있는 국가까지 포함하여-에 있다. 대부분의 책들은 책장 안쪽에서 고요히 잠든 채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만, 아무튼 자기 손에서 태어난 무언가가 지금 있는 곳으로부터 8000킬로 미터가 넘게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있다는 현실은 꿈처럼 낭만적인 기쁨을 선사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나를 더 배부르게 먹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지는 않아도, 사치품을 거리낌 없이 살 수 있는 경제적인 넉넉함을 허락해 주지는 않더라도. 때때로 이런 생각이 더 이상 합리화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럽기도 한데, 어찌 됐든 나의 작업이 더 멀리 갔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바람 하나가 다시 몇백만 원을 들여 인쇄하는 방아쇠를 당길 만큼 힘이 세지 않았는가.

또 한 번 재쇄를 결정하고 나서야 아쉬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표지 제작에 사용한 종이가 곧 단종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표지 종이를 바꿔 다시 얼마든지 디자인할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사용한 종이로 제작되는 에디션은 정말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 비자발적으로 리미티드 에디션이 되어버린 이 책 바깥에는, 이렇게 소란스러운 이야기들이 추억처럼 묻어나는 중이다.

나는, 작가는 언제까지 중쇄를 할까? 중쇄의 기준은 무엇일까. 독자의 요청이 있을 때? 책이 아주 잘 팔리지 않는 한 그런 경우는 드물 것 같다. 대신 이 질문은 다시금 작가의 의지나 태도에 관한 주제로 돌아가게 만든다. 계속 책을 만드는 이유나 그림을 그리는 이유나 작업을 하는 이유나 아무튼 무용한 것을 향한, 이상하고 지루한 용기를 얼만큼 발휘할 수 있을지, 기한 없는 질문이 허공에 번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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