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백한구름 작가] ‘숲의 정령’은 깊은 몽상에 잠긴 주인공이 혼자 있는 방에서 숲의 정령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내용의 단편소설이다. 자작나무와 전나무가 가득했던 아름다운 고향에 살던 정령은 고향이 불타버리자 도망쳐 나온다. 돌로 만들어진 도시에 살고 있는 주인공에게 찾아와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을 토로한다. 주인공은 마치 오래전 고향 친구처럼 익숙한 얼굴의 숲의 정령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비춰본다.
작업을 하기 위해 소설 내용과 연관된 키워드를 정했다. 키워드는 검은색, 잉크, 시간, 숲이었다. 작업하다 보니 작은 규모의 키워드들도 나왔다. 솔방울, 잎, 가시 돋친 얇은 나뭇가지, 낙뢰, 잉크펜, 눈처럼 보이는 자작나무 무늬, 시계. 글의 내용을 상징할 상징물들이었다. 나는 이러한 상징 요소들을 어떻게 시각화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각각의 상징에 나만의 생각을 담으려고 했다. 예를 들어, 솔방울은 정령이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 보낸 초대장이고, 가시 돋친 얇은 나뭇가지는 낙뢰와 같으며, 낙뢰는 숲의 정령의 진짜 본모습이다. 눈처럼 보이는 자작나무 무늬는 우리를 지켜보는 고향의 텅 빈 영혼이자 저 멀리에서 소리치는 파도처럼 솔직한 우리의 마음이다.
무엇보다 책을 만들며 ‘리히텐베르크 형태’라는 과학적 현상과 ‘송과선’이라는 신체 기관을 알게 되어 재미있었다. 리히텐베르크 형태는 과학자이자 풍자 작가였던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리히텐베르크(1742~1799)가 찾아낸 현상이다. 번개가 치면 전기가 흐르는 물체는 전하를 잃게 되는데 이를 방전이라고 한다. 리히텐베르크 형태는 물체의 방전이 일어난 경로를 뜻한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번개가 물체에서 뻗어나간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많이 나온다. 그 모습은 번개이기보다 나뭇가지 같다. 리히텐베르크 형태는 자연이 생존을 위해 움직이는 반복적 형태를 보여준다.
동시에 나는 솔방울처럼 생긴 ‘송과선’이라는 신체 기관을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 데카르트의 송과선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었지만 대부분 잊고 있었는데, 내가 마침 저작권을 구매할 때 연락을 주고받은 담당자님의 성함이 ‘송지선’이셨고(?), 솔방울을 계속 그리다 보니 문득 떠올라 찾아봤다. 송과선은 우리의 두 눈 이외에 빛을 감지하는 또 다른 기관이다. 수면에 도움을 주는 멜라토닌을 만들어내며 신체 리듬을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한다. 작은 솔방울이 사람의 시간 감각을 관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시간이 책과 전시 모두의 주제였던 만큼, 송과선이 떠오르는 솔방울이라는 상징물은 적합했다.
이어서 나는 책을 어떻게 전시할 것인지 고민했다. 책 속에서 일부분을 떼어 작품화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우선 내용상 가장 중요했던 첫 번째 문장을 떠올렸다. 소설의 가장 첫 문장은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흔들리는 둥근 잉크병 그림자의 윤곽선을 펜으로 따라 그리고 있었다.’였다. 잉크병 그림자의 윤곽선을 따라 그린다는 표현이 글과 그림의 연결 지점을 함축하고 있었다. 나는 투명한 아크릴판에 드로잉을 각인해 흰 벽면에 걸었다. 긴 못으로 걸어 벽면에서 조금 띄워 걸고 나니 빛이 대각선으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벽에 그림자가 졌다. 각인된 그림과 그림자가 살짝 옆으로 어긋나게 겹치며 그림보다 그림자가 더 눈에 진하게 들어왔다. 작품 제목은 ‘잉크병 그림자’다.
다음으로 주인공이 숲의 정령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인상을 표현하려고 했다. 주인공은 정령을 보고 독백한다. ‘그렇다, 물론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 아마도 그를 좋아했던 것도 같은데,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를 특정하지 못할 뿐이다.’ 주인공은 숲의 정령을 보고 마치 오랜만에 만난 고향 친구처럼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 정령은 주인공의 감정을 비춰주고 그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내용에 맞추어 정령의 얼굴 모양을 본뜬 거울 가면을 만들었다. 주인공의 모습을 비추기 위해 거울로 만들어진 가면이다. 관객은 얼굴을 비춰보며 각자의 가면을 만들어 숲의 정령을 만날 수 있다. 제목은 ‘거울 가면’이다.
책과 전시를 서로 연결하는 과정이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하나의 텍스트가 넓은 시각적 스펙트럼을 가진다는 사실을 느꼈다. 나는 앞으로도 시각적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상관없다.
미현 언니와 내가 만들어낸 두 가지의 빛은 각각 달랐지만 그럼에도 함께한 시간이라는 공통성이 있었다. 아마 앞으로 미현 언니는 나와 다른 길로 나아갈 것이다. 나는 지금 당장은 모르겠지만 훗날 나이 들어서라도 예술을 계속할 생각이다. 어차피 내가 목표로 하는 예술이란 최정상급 예술가라는 자리가 아니다. 정말 아름다워서 나도 당신도 서로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내 목표다. (내가 어렸을 때 예술에 빚을 졌듯이)
이번 한파와 눈에도 전시에 찾아와 주신 지인분들, 관객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와 함께 전시를 만든 미현 언니한테 고맙다. 추웠기 때문에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상으로 ‘빛의 이면’ 전시 작업기를 마친다.
*추신
2인전이라 함께 오프닝 음식도 준비하고, 리플렛도 제작하고, 서로의 지인을 만나는 등 친구와의 좋은 기억을 쌓았다. 눈이 오는 날에 눈이 하얗게 내리는 데 ‘거울 가면’ 작품에 눈 내리는 풍경이 비쳐서 아름다웠다.
*책을 구매할 수 있는 곳
다시서점, 가가77page, 깨북, 독서관, 책방곱셈(살롱페), 사소한책방, 책가도, 이것은서점이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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