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긴 상처에 비치는 '잔인한 세상'은...21세기 되살아난 위고의 '웃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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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긴 상처에 비치는 '잔인한 세상'은...21세기 되살아난 위고의 '웃는 남자'!

독서신문 2025-02-21 09:30:00 신고

뮤지컬 '웃는 남자'. [사진=EMK뮤지컬컴퍼니]  

‘귀까지 찢어진 입, 드러난 잇몸과 으깨어진 코, 너는 이제 가면을 쓸 것이며, 영원히 웃으리라.’ (빅토르 위고, ‘웃는 남자’ 중에서) 

여기, 울어도 웃는 소년이 있다. 빈자는 ‘사람’도 못되던 17세기 영국. 범죄집단 콤프라치코스에게 ‘입이 귀까지’ 찢긴 채 버려진 이다. ‘웃음’이자 ‘상처’에 갇힌 그 소년의 이름은 그윈플렌. 학대당하고 내쳐졌으나 소년은 원망도 분노도 없다. 예의 그 미소 띤 얼굴로 설원을 걷고 또 걷는 중이다. 맹렬한 추위 속 갓난아이를 발견하자 ‘데아’(별)라고 이름까지 지어주며. 그러던 중, 떠돌이 ‘우르수스’를 만난다. 

몸짓도 말투도 거친 이 남자. 알고 보니 ‘츤데레’? 배곯는 이들에게 우유와 빵, 잘 곳을 내어주는데. 그렇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빈자들은 ‘가족’이 되고, 시간이 흘러 뒷골목 유랑극단으로 성공한다. 그러나 무대를 보러온 조시아나 여공작으로 이 끈끈한 세계에 불협화음이 인다. 당대 ‘괴물쇼’를 소비하던 귀족 군이자 일탈을 찾던 그 여공작이 청년 그윈플렌에게 이끌리면서.
 

[사진=EMK뮤지컬컴퍼니]  

피부에서 떼 낼 수 없는 괴물 같은 미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가난…. 난생처음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되어본 청년은 ‘가능성’으로 요동친다. 어쩌면 나도, 더 넓고 높은 세상에 갈 수 있지 않나. 괴물인 나도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가난한 '아버지' 우르수스는 말한다. 넌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그런 건 귀족이나 갖는 거라고. 그런데 웬걸, 고민의 시간이 무색하게 그는 (모종의 이유로) 진짜 ‘궁’에 입성한다.

거장의 ‘숨은’ 작품, 21세기 흥행작으로

[사진=EMK뮤지컬컴퍼니] 

‘레미제라블’, ‘파리의 노트르담’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거장. 빅토르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를 각색한 동명의 뮤지컬 얘기다. 위고가 인류에 남긴 고전의 힘은 세다. 장대하면서도 섬세한 서사와 날 선 비판이 담겨 영화-뮤지컬로도 시대를 넘어 가닿았다. 하지만 ‘웃는 남자’라면 상황이 모호했다. 작가 스스로 ‘가장 위대한 소설’로 자평했고, 이후 ‘배트맨’ 조커 캐릭터의 영감이 됐다. 하지만 작품 자체는 알려지지 않아 '숨은 명작'이란 애매한 수사가 따라다녔다. 2012년 제작된 영화도 미진한 평을 받았을 정도. 그러나 2018년, ‘웃는 남자’는 다른 곳도 아닌 한국에서 창작 뮤지컬로 대성공을 거뒀고, 지난 1월 네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티켓 오픈도 예매율 1위를 기록, 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

유랑극단의 활기, 달빛 비추는 강물의 치유력
…뮤지컬로 구현된 빈자들의 축제와 연대

'웃는 남자'의 그윈플렌, 데아, 우르수스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각색한 연극으로 서민들의 스타가 된다. [사진=EMK뮤지컬컴퍼니] 

“부자들의 낙원은 빈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 서울의 빌딩과 지하철 광고를 수놓으며 공명하는 극의 주제문처럼, 작품은 빈부의 격차를 동력으로 굴러가는 화차 같다. 빈부의 묘사는 관음증을 자극하는 소재다. 하지만 작품은 빈자의 삶을 ‘지옥’으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원작에서 빈자들을 위협하는 극심한 추위와 눈발은, 흰빛의 보드라운 천을 두른 무용수의 몸짓으로 구현된다. 그 속에 그윈플렌과 데아가 만나니, 빈자들의 연대와 만남에 대한 축복이다. 더 비약하자면, ‘현실의 상황과 달리 아름다운’ 결말에 대한 복선처럼도 느껴진다.

빨랫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눈물은 강물에' 넘버 중. [사진=EMK뮤지컬컴퍼니] 

우르수스가 이끄는 뒷골목 서커스는 어떤가. 광대, 도마뱀 소년, 뱀 여인, 곡예사 등이 뭉쳐 한 가지 색으로 정의불가한 신비로운 색채와 기묘한 활기로 극장을 채운다. 관객들을 17세기 영국 뒷골목의 혼종적인 민중 문화로 초대하는 것. 앙상블 여성들이 꾸미는 '눈물은 강물에'는 찬란하다. 돌봄 노동의 장인 빨래터를 배경으로, 남루한 생활복을 입고도 ‘캉캉 쇼’를 구현한다. 가난한 민중의 세계는 이처럼 가능성과 연대의 장소가 된다. 뮤지컬이라는 마법과 함께.

빈자와 부자, 두 바퀴가 동력...‘화차’ 같은 뮤지컬

오히려 민중의 삶이 ‘지옥’인 건 그들 자신이 아닌, 제도에 있다. 나라의 비밀 경찰조직인 ‘와펜테이크’  따위다.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사람 잡는 이 존재가 바로 민중에 대한 억압이자 스트레스. 귀족들의 화려한 ‘가든파티’는 어쩐지 '예쁜 장난감' 같다. 뒷골목의 스산한 어둠을 등불로 밝힌 빈자들의 공간보다 더 극렬한 빛이 쏘아질수록 그렇다. 귀족의 서사가 납작한 건 아니다. 예컨대 조시아나는 단순히 그윈플렌의 '기괴함'을 소비하거나, 욕망의 화차로만 남지 않는다. 그윈플렌의 미소에 자신의 결핍을 투사하는 ‘내 안의 괴물’ 넘버는 그 자신의 껍데기를 찢어발기는 은유이자 자아 탐구의 여정으로 느껴진다.

대체로 아름다운 1막과 달리, 2막은 화차처럼 세상과 돌진한다. “괴물이자 신”, “밑바닥” 출신이라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던 그윈플렌의 존재 자체 때문이다. 뒷골목 무대를 누비던 광대는 이제, 궁과 의회장이 무대다. 웃음을 은유한 거대한 반원 모양의 의회장. 그리고 붉은 기운은, 1막의 춥지만 부드럽던 푸른빛과 대비된다. ‘경들 / 돈 많고 배우신 분들 / 봐요, 하늘의 벌이 두렵지 않나 / 슬픔으로 가득 찬 거리 풍경 / 굶주리는 또 다른 세상을’. 아름다운 목소리가 성을 채우고. 그윈플렌은 과연, 귀족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찢겨진 미소 뒤 한 남자’, 
이 땅에서 행복할 수 없나

'웃는 남자' 2막 중에서. [사진=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은 마치 서로 다른 것을 한 몸에 지닌 ‘반인반수’ 같다. 연출은 화려한데 섬세하고, 각색은 대중적인데 문제의식은 살아있다. ‘180분’이지만 온갖 시공간을 오가는 1,000페이지 가량 원작의 ‘와우 포인트’만 살려 한눈 팔 수가 없다. 행복을 꿈꿔본 적도 없던 그윈플렌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며 욕망하는 순간은 어떤가. 핸드폰 하나로 ‘궁전’을 마주하는, 양극화 시대의 가난한 청년들의 마음과 포개진다. 17세기를 무대로, 19세기에 쓰인 원작의 힘. 동시에 21세기로 부활시킨 뮤지컬의 역량이다.

그럼에도 뮤지컬의 서사가 소설보다 탄탄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 공백은 ‘음악’이란 압도적 무기와 시적인 가사로 잇는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웅장하고 처연한 멜로디와, 한국 대표 음악감독 김문정의 지휘. 무엇보다 노래로 나라를 세웠다 허무는 명창들의 향연이다. 다수 장면에 등장하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음악적’인 변사로 관객을 동기화한다.

‘세상 같은 건 다 버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은 숨을 죽인다. 여기서는 말 많던 우르수스도 말이 없다. 꽉꽉 채워진 작품에서 이 말 없음의 장면은 더 큰 감정을 자아낼 것이다. 이 땅에서 행복할 수 없는 이들을 바라보는 우르수스의 얼굴과 자세는 마치 영화 ‘대부3’에서 알파치노의 절규를 떠올리게 한다. 자국인 프랑스의 정치에도 직접 참여했던 원작자, 빅토르 위고는 ‘웃는 남자’를 망명 생활 도중 썼다. 19세기 프랑스인이 17세기 영국을 무대로 소설을 쓴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분명 17세기의 극심한 신분격차 시대에서 자국의 배곯는 민중과 타락한 세계를 봤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의복도, 배경도 다른 뮤지컬에서 21세기의 우리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의 찢겨진 슬픈 미소이자, 아픈 상처 사이로. 슬퍼서 울고 싶은데, 박수치며 웃게 되는 커튼콜마저 작품의 기묘한 연장 같다. 공연은 3월 9일까지.

[독서신문 유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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