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한구름 칼럼] 호주 여행기② 장소라는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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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한구름 칼럼] 호주 여행기② 장소라는 흔적

문화매거진 2025-02-17 11:50:33 신고

[백한구름 칼럼] 호주 여행기① 장소라는 흔적에 이어 
 

▲ 줄리 메레투 급진적 상상의 트랜스코어 전시 계단 / 사진: 백한구름 제공
▲ 줄리 메레투 급진적 상상의 트랜스코어 전시 계단 / 사진: 백한구름 제공


[문화매거진=백한구름 작가] 제목 ‘급진적 상상의 트랜스코어’는 새롭게 공개된 작품이자 전시의 주요 작품인 트랜스페인팅TRANSpaintings을 염두에 둔 주제다.

‘트랜스코어’란 변화한다는 뜻의 트랜스Trans-와 신조를 뜻하는 코어Core가 합쳐진 단어로 다층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트랜스코어라는 전자음악의 하위 장르를 뜻할 수 있고, 말 그대로 지속해서 변화한다는 의미, 혹은 투명함Transparent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이번 전시에서 관객은 투명한 재료로 만들어진 트랜스 페인팅을 포함해, 페메닌 인 나인Femenine in Nine 연작, 작업 초기의 드로잉, 기존 대형 추상 회화를 모두 관람할 수 있다. ‘추상은 설명, 언어, 사람들이 금지하는 것, 섣부른 평가를 거부하기 위한 전략’(‘Abstraction is a strategy. A refusal of description, of language, of containment, of pigeon-holing.’)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관람을 통해 추상이라는 도구로 우리가 아는 것 너머를 보는 급진적인 상상을 실천해 보자.

▲ 트랜스페인팅 전경 / 사진: 백한구름 제공
▲ 트랜스페인팅 전경 / 사진: 백한구름 제공


공개된 트랜스페인팅은 총 7점이다. 입구보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트랜스페인팅들만의 공간이 나온다. 작가는 실크스크린에 쓰이는 재료와 비슷한 모노필라멘트 폴리에스테르 메쉬monofilament polyester mesh를 사용해, 기존의 전통적 회화를 투명한 미래적 분위기로 변화시켰다. 여러 겹의 투명한 추상 회화가 겹쳐 수직으로 서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새로운 시대에 탄생한 기계들이 서있는 것 같다. 베를린 예술가 나이리 바그라미안Nairy Baghramian이 제작한 업라이트 브라켓Upright Brackets이라는 장치와 공생해 가능했던 수직 설치는 줄리 메레투의 작품에 특유의 웅장하며 차가운 느낌을 더해줬다. 

▲ 트랜스페인팅 작품 / 사진: 백한구름 제공
▲ 트랜스페인팅 작품 / 사진: 백한구름 제공


나는 투명한 작품의 앞뒤로 움직이면서 좌우로 작품을 뒤집어 보았다. 이는 기존 회화의 뒷면을 보는 행동이었다. 같은 작품이 단지 좌우로 반전되었을 뿐인데 전혀 다른 작품으로 보였다. 추상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실제로 작업 과정에서 작품을 좌우, 위아래로 뒤집으며 시각적 적합성을 찾기도 하는데 이러한 작업 과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 페메닌 인 나인 작품 / 사진: 백한구름 제공
▲ 페메닌 인 나인 작품 / 사진: 백한구름 제공


작가의 기대와는 다르게(아마 새로 야심차게 공개한 신작이 나라는 관객에게 와닿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나에게 가장 와닿은 작품은 페메닌 인 나인Femenine in Nine(2022-2023)이었다. 총 아홉Nine개의 작품이 회전하는 연작으로, 다양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미술인으로서의 동질감과 친숙함이 호기심으로 새어 나오는 듯했다.

여성이라는 뜻을 가진Feminine이 아닌 Femenine인 이유가 뭘까? 이 작품의 다른 이름은 ‘검은 회화’다. 검은 배경 위에 메탈릭한 스프레이 잉크로 줄리 메레투 특유의 흔적이 보인다. 작가는 유타 사막을 여행했을 때, 돌 위에서 흰색 스프레이처럼 보이는 자연이 만들어낸 흔적을 발견하고 흥미로워했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기아 다이나미스Agia Dynamis라는 16세기의 작은 교회를 방문했을 때는 시간이 지나 모호해지고 검은색으로 바뀌어 옅은 후광만을 보여주고 있는 오래된 벽화를 보고 마음에 남겼다. 역사와 자연이 만든 흔적을 여행으로 경험하고 경험에서 나온 직관으로부터 작업을 진행했다.

나 역시 줄리 메레투의 이야기로 떠오른 이번 여행에서의 기억이 있다. 블루 마운틴Blue Mountain의 링컨스 락Lincoln’s Rock을 다녀왔는데, 이 곳은 푸르게 보일 정도로 아득한 산맥과 산맥을 전망할 수 있는 절벽으로 유명한 장소다. 해가 산 너머로 지는데 사막처럼 붉은 흙바닥에 평평한 식탁처럼 보이는 흰 돌이 놓여있었다. 나뭇가지로도 쉽게 긁히는 돌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남긴 하얀 흔적들 위로 걸어갔다. 바람이 부는데 절벽 아래를 보니 까마득해서 몸이 반사적으로 뒤로 밀렸다. 내 발 아래로 해가 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모든 것이 자연이라는 고요함 속에 잠겨 있었다. 내가 받은 상처들의 잔해가 무심히 드러나고, 햇빛 아래에서 이해받았다.

▲ 페메닌 인 나인 작품 / 사진: 백한구름 제공
▲ 페메닌 인 나인 작품 / 사진: 백한구름 제공


이 이야기에 앞서 연작을 처음 봤을 때는 어둠 속 고민에 잠긴 여성이 눈을 감아 눈 안으로 들어온 빛을 작가가 표현한 것 같았다. 비문증처럼 떠다니는 빛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했다. 고민하는 여성이자 잠들기 전에 여성에게서 곤히 이야기를 듣는 아이가 되어 마음이 조용해졌다. 나는 여자가 작게 중얼거려 해석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궁금해했다. 

작가는 작품을 작곡가이자 건축가였던 이안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의 드로잉에 비유하고, 음악가 줄리어스 이스트맨Julius Eastman의 페메닌Femenine이라는 앨범에서 제목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단지 감각으로 회화를 봤고, 직관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작업을 해나갈수록, 직관과 우연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지 놀란다(‘The more I work, the more I am blown away by how much intuition and chance bring to me and teach me.’)’는 작가의 말처럼 과장된 의도보다는 직관과 실수가 진실을 알려주는 것 같다. 자신의 슬픔을 다룬 음악에 자연스럽게 끌리듯 우리는 의도를 자세히 알지 못해도 자연스럽게 끌린다.

▲ 드로잉 작품 (등대) / 사진: 백한구름 제공
▲ 드로잉 작품 (등대) / 사진: 백한구름 제공


마지막으로 연작보다 가벼운 학생 시절 드로잉 역시 볼 수 있었다. 시간에 따른 지리적 변화를 목록화하고, 혁명이나 문화적 추방 그리고 이주를 통한 사람들의 움직임을 구조적으로 맵핑해 온 드로잉이었다. 나는 알 수 없는 기호들이 여백 위를 떠다니는 드로잉을 보며 하늘 위 등대지기가 등대에서 기록한 풍향 일지, 개미들이 움직이며 자신의 경로를 기록하여 개미집을 지을 위치를 찾는 과정을 그린 지도를 상상했다. 사람들의 움직임을 거시적으로 파악해 왔기에 작가의 중심축은 땅 위 한 지점이 아니라 허공인 것 같았다. 이는 앞서 얘기한 추상을 작업하는 과정과도 맞닿아 있었다. 상하좌우를 뒤집어 만들어낸 적합성은 중력을 벗어났다.

▲ MCA Australia 외부 모습 / 사진: 백한구름 제공
▲ MCA Australia 외부 모습 / 사진: 백한구름 제공


줄리 메레투가 이번 ‘급진적 상상의 트랜스코어’ 전시를 시드니 MCA Australia에서 연 것은 단지 작가가 가진 국제적인 명성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원주민 가디갈Gadigal과 이후에 정착한 영국 이주민들이 만들어낸 역사로 이루어진 시드니이기에, 장소라는 흔적을 연구해 온 줄리 메레투와 이곳의 풍경은 연관이 있었다. 

드로잉을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전시장 밖으로 나왔다. 밖은 여전히 바다로 가득했고 나는 홀로 그곳에 서 있었다. 약간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이 시간을 통해 얻은 것이라곤 기록으로 남길, 혹은 이야기로 전할 전설 같은 경험뿐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혼자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호주가 나에게 남긴 흔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에, 나의 전설, 나의 이야기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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