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백한구름 작가] 땅 위에 지워질 흔적을 새긴다. 내일 들려줄 이야기를 위해.
처음으로 혼자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2024년 초에 구상했으나 실제로 비행기에 탄 날은 2025년 1월이다. 홀로 여행을 가기로 한 이유는 혼자만의 힘으로 어려운 도전 하나를 완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를 단단히 다져줄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은 겨울이니까 따뜻한 나라인 호주에 가기로 했다. 내가 사는 곳과 여러모로 정반대인 장소지만 시차는 겨우 2시간이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안에서 초록색 빛과 함께 졸다 보니 10시간이라는 시간이 겨우 지났다. 애매한 맛의 저가 항공 기내식도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는 필요했다.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에서 사 온 USIM이 작동되지 않았다. ‘This is not working’이라는 짤막한 영어로 식은땀을 흘리며 나와 비슷한 또래인 여자 인도계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친절한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시드니에 대한 낯가림을 덜 수 있었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공항을 나섰다. 피부에 닿는 따뜻한 공기와 화려한 야자수들이 이곳이 남반구의 대륙인 호주라는 사실을 알게 해줬다. 곧 우버를 타고 록스Rocks에 있는 호텔로 갔다.
오페라 하우스를 설계한 건축가가 오렌지 껍질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바다를 향한 흰색의 오페라 하우스의 표면에는 오렌지색으로 갈라진 얇은 선이 보였다. 용기를 내서 앞에 늘어선 바Bar 들 중 한 곳에 갔다. 눈이 부셨는지 한쪽 눈을 찡그리고 있던 바텐더에게 스프리츠 Aperol Spritz 한 잔을 주문했다. 바다를 향한 곡선에 자리를 잡으니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얼음이 녹은 오렌지색 칵테일과 컵에 담긴 빨간색 줄무늬의 짧은 종이 빨대는 눈앞의 풍경을 상징했다. 파란빛 바다와 항구, 신이 만든 욕조 위 장난감처럼 떠가는 노란색 크고 작은 페리가 마치 움직이는 엽서처럼 선명했다. 엽서 위에 적힐 이름은 서큘러 키Circular Quay. 시드니를 대표하는 항구인 이곳에 오페라 하우스뿐만 아니라 시드니의 현대미술관인 MCA Australia가 있다.
호주에 전시를 보러 온 건 아니었지만(코알라를 보는 게 목적이었다) 지구 반대편에 왔으니 미술관에 가보기로 했다. 마침 내가 이전부터 궁금해했던 국제적 작가인 줄리 메레투의 전시 ‘급진적 상상의 트랜스코어 A Transcore of the Radical Imaginatory’가 진행되고 있었다.
줄리 메레투Julie Mehretu(1970~)*는 에티오피아계 미국인으로 도시와 환경, 지리, 장소, 이와 관련된 현대인의 경험과 심리를 대형 회화로 다뤄온 작가다. 그는 역사라는 팔림프세스트(사람들은 종이를 쓰기 이전에 동물의 가죽인 양피지를 기록 매체로 사용했다. 양피지를 구하기 어려워 한번 기록에 쓰인 양피지의 텍스트를 씻어내고 그 위에 다시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팔림프세스트라고 한다.**)를 탐구하고 제스처와 같은 동적인 표현으로 공간과 장소가 주는 감각을 회화로 연구해 왔다. 내가 줄리 메레투를 처음 알게 된 작품은 스타디아Stadia II(2004)다. 고대 여신이 가진 이름 같은 ‘스타디아’는 스타디움(경기장)의 복수형 표현이다. 작가는 경기장이 주는 에너지를 추상 회화로 표현했다. 둥근 경기장에 앉은 사람들의 환호처럼 여러 개체가 거대한 전체를 만들어낸다. 겹친 선과 도형, 흔적이 관객으로 하여금 떠 있는 듯한 허공의 감각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알고 있던 작가의 실제 작품을 우연히 볼 수 있게 된다니 감사했다.
미술관 안에 들어가니 MCA Australia가 유라 국가Eora Nation 원주민 가디갈Gadigal의 땅 위에 세워졌으며, 미술관이라는 주체로서 땅의 전통적인 주인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내용이 벽면에 쓰여있었다. 밑에는 읽을 수 없는 가디갈 언어 ‘Museum of Contemporary Art Australiagu wawa Gadigalmirung nura badu garrigarrang’가 함께 했다. 벽면을 지나 미술관 중앙으로 가면 창밖에 정박한 배가 보이는데, 그곳 맞은편에 계단이 있다. 나는 전시가 시작되는 4층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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