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루냐 문학 거장 자우메 카브레 단편소설 14편 수록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인생은 하나의 경로도 목적지도 아닌 여행이며, 우리가 사라질 때는 그 위치가 어디든 우리는 언제나 여행의 중간 지점에 있다는 것을"(단편소설 '겨울 여행' 에서)
비가 내리는 겨울날, 중년의 남성 졸탄 베셀레니는 긴장한 듯 잔뜩 굳은 얼굴로 오스트리아 빈의 중앙 묘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잠든 곳이다.
베셀레니는 피아노를 공부하던 스물 여섯살 학생 시절에 마찬가지로 음악을 공부하러 빈에 온 회색 눈동자의 여인 마르게리타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행복한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마르게리타는 베셀리니를 만난 지 28일째 되는 날 중앙 묘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자기 결별을 통보한다.
사실 마르게리타는 빈에 음악을 공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자신이 정말 결혼하고 싶은지 확신이 없어 생각을 환기하려 여행을 온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그 말에 충격받은 베셀레니는 자신과 함께하자고 설득했으나 마르게리타는 거절한다. 이에 베셀레니는 "25년 뒤 오늘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간청하고, 마르게리타는 이를 수락하고 고향인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돌아간다.
스페인 카탈루냐 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소설가 자우메 카브레(78)의 단편소설집 '겨울 여행' 표제작 줄거리다. 작가가 1982년부터 집필한 단편들을 모아 2000년 자국에서 펴낸 이 책이 최근 국내 번역 출간됐다.
표제는 국내에서 흔히 '겨울 나그네'로 번역하는 연가곡에서 따 왔다. 빌헬름 뮐러의 시에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가 곡을 입힌 음악으로, 실연당한 남성이 겨울에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느끼는 슬픔을 표현했다.
제목이 유래한 연가곡과 마찬가지로 '겨울 여행' 표제작에서도 주인공 베셀레니가 25년 동안 마르게리타를 그리워하다가 약속의 장소로 향하지만, 다시 한번 실연의 아픔을 겪고 상심에 빠진다.
책에 수록된 열네 편의 소설에는 저마다의 외로움과 아픔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주인공들의 아픔은 해소되지 않고 계속돼 '인생은 목적지가 아닌 여행'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남은 남성이 자식들이 자기 핏줄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는 '유언장',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지독한 무대 공포증에 시달리는 '사후 작품', 지적 장애가 있는 아들이 전쟁에 징집당하고 홀로 남은 어머니가 슬픔에 빠지는 '발라드' 등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개별적으로도 읽히지만, 몇몇 작품은 슈베르트의 음악 또는 화가 렘브란트의 그림이 등장하는 공통점이 있다. 순서상 처음 배치된 '사후 작품'과 마지막에 배치된 표제작은 서로 이야기가 연결된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처음 각각의 단편을 집필할 때는 독립된 이야기들의 묶음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작업을 해 가면서 각각의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스페인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출생인 카브레는 '환관의 그림자'(1996년), '파마노의 목소리'(2004년), '나는 고백한다'(2011년) 등의 소설에서 '악'(惡)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사유를 담아내 호평받았다.
작가는 카탈루냐 비평상과 문학 명예상, 프랑스 쿠리에 앵테르나쇼날 최우수 외국 문학상 등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국내에선 2020년 '나는 고백한다'가 번역 출간됐다.
권가람 옮김. 민음사. 308쪽.
jaeh@yna.co.kr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