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황명열 기자] 서울 강남구 S2A는 신년 기획전 ‘필(筆)과 묵(墨)의 세계: 3인의 거장’을 오는 3월 22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는 조선시대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19세기 최고의 서예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그리고 20세기 미니멀리즘 추상미술의 거장 윤형근(尹亨根, 1928~2007)이 한자리에 모인다. 시대와 예술 장르는 서로 다르지만, 세 작가의 작품을 ‘필(筆)과 묵(墨)’이라는 공통분모로 연결해 한국 회화사와 서예사, 그리고 현대 추상의 흐름을 폭넓게 조망할 수 있는 자리다.
한국 미술사학자이자 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 명지대학교 석좌교수가 기획을 맡았다. 유 교수는 “18세기를 대표하는 겸재 정선은 정형화된 관념산수에서 벗어나 실제 풍경을 세밀하고 생동감 있게 담아냈고, 19세기 추사 김정희는 서예라는 장르를 예술적 차원으로 확장했으며, 20세기의 윤형근은 극도로 간결한 필법과 묵색(墨色)을 통해 순수 추상 세계를 구축했다”고 설명하면서 “이들이 살았던 시대와 표현 양식은 달라도, 예술적 뿌리는 모두 ‘필과 묵’에 있었다”고 강조했다.
전시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 중 하나는 겸재 정선의 노년 명작으로 꼽히는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이다. 임진강의 실제 풍경을 담은 이 진경산수화는 겸재가 66세이던 1742년에 완성됐으며, 겸재 스스로 소장했던 진본이 대중 앞에 공개되는 것은 2011년 이후 약 14년 만이다.
‘연강임술첩’은 경기 동부 지역 순시를 나선 홍경보(당시 경기도관찰사)와 신유한(연천현감), 그리고 겸재(양천현령)가 우화정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담았다. ‘우화등선(우화정에서 배 타고)’과 ‘웅연계람(웅연나루에 닻을 내리고)’ 두 폭의 그림을 통해 조선 후기 진경산수의 정수를 보여주는 동시에, 함께 실린 홍경보와 신유한의 글에서는 당시 풍류와 인연을 깊이 있게 느낄 수 있다. 산수·인물·글씨가 한데 어우러진 이 작품은 겸재 예술세계의 폭과 깊이를 대변하며, 한국 산천과 민초의 삶을 생동감 있게 포착한 진경산수의 본령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이번 전시에서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의 서예 세계를 단계별로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도 주어진다. 간찰(편지), 시고(원고), 편액(현판) 등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통해 추사가 예서(隷書)·행서(行書)·초서(草書)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독창적 서풍을 완성한 과정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특히 ‘대팽고회(大烹高會)’로 알려진 대련(對聯) 작품과 함께, 중년(39세)·제주 유배 시절(62세)·과천 시절(71세)에 걸쳐 변화해온 추사체의 궤적도 만날 수 있다.
유홍준 교수는 “한 사람이 쓴 것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추사의 서체는 여러 차례 변모했다”며 “이는 ‘고전으로 들어가 새것으로 나온다(入古出新)’ 창작 자세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추사의 글씨는 옛 비문(금석문)과 고전을 연구하고, 이를 과감히 변용해 새롭게 재창조했다는 점에서 현대에도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 후기와 근대를 상징하는 두 거장 사이에서, 20세기 한국 추상회화를 대표하는 윤형근의 미니멀리즘 작품도 전시의 한 축을 이룬다. 붓질을 최대한 절제하고 암갈색(Burnt Umber)·군청색(Ultramarine) 등 단색조만으로 캔버스를 채워가는 그의 작품은 ‘필과 묵’이라는 동양적 미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결과물이다. 윤형근 특유의 절제된 색면에는 동양화의 농담(濃淡)과 번짐 효과가 고스란히 살아 있으며, 이는 “먹빛이 검지만은 않다”는 철학적 고찰을 회화로 풀어낸 듯한 인상을 준다.
유 교수는 “45년 전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윤형근을 인터뷰했는데, 그가 ‘나의 붓질 뿌리는 추사에 있다’고 했다”며 “당시엔 비약처럼 들렸지만, 지금은 그의 예술세계를 꿰뚫는 고백이었다고 느낀다”고 밝혔다.
전시장 초입에는 겸재·추사·윤형근의 작품을 나란히 배치해 서로 대화하듯 배경과 시선이 어우러지는 구성을 선보인다. 자연과 인간,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세 화폭을 한 공간에 나란히 두어, 한국 예술사의 큰 흐름과 함께 필과 묵을 대하는 세 거장의 시선을 동시에 체감할 수 있다.
한편, S2A는 글로벌세아그룹 계열사인 세아상역㈜이 운영하는 문화사업 공간으로 2022년에 개관했다. 이번 전시는 고미술을 주제로 한 첫 번째 전시로, 국내 주요 미술관·갤러리뿐 아니라 개인 소장가들의 명품까지 한자리에 모았다. 전통 미학에 현대적 해석을 더해 세대를 아우르는 예술의 언어로 ‘필과 묵’이 빚어내는 동양적 정수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이번 전시의 가장 큰 매력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추사 김정희의 독창적 서예, 그리고 윤형근의 절제된 색면 추상이 함께 펼쳐지는 이번 전시는 한국 예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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