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인간은 나의 덩치를 보고 언제나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를 차지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인해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저렇게 커다란 동물을 무엇에다 쓸까? 태초부터 인간은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19쪽>
작은 정어리도 다른 정어리를 공격하지 않는다. 느림보 거북이도 다른 거북이를 공격하지 않는다. 탐욕스러운 상어도 다른 상어를 공격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에서 자기와 비슷한 이들을 공격하는 종은 인간밖에 없는 것 같다. <37쪽>
인간들이 우리를 사냥하는 이유는 우리의 살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창자에 있는 기름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 기름을 태워서 집 안을 밝게 비추려고 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무서워서 우리를 죽인 것이 아니다. 어둠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은 우리 고래의 몸속에 빛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어둠에서 해방되기 위해 우리를 죽이는 것이다. <51쪽>
우리 고래들과 돌고래들은 저 먼 곳에서 온 다른 인간들이 갈수록 많아져서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허락을 구하지도, 그렇다고 나중에 고마움을 표하지도 않고 숲과 땅, 그리고 바다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제멋대로 가져가는 낯선 인간들 말이다. 고래잡이배 선원들은 배은망덕과 탐욕에 찌든 세상에서 온 인간들의 전형이다. <52쪽>
고요하고 조용한 바닷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중, 엄청나게 많은 배들이 우리 고래들을 잡기 위해서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간들은 램프에 쓸 기름뿐만 아니라, 용연향이라고 불리는 진귀한 물건 ― 물에 꽃과 허브의 향을 넣기 위해 사용된다 ―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를 쫓아다닌다는 이야기였다. 인간들은 자신의 몸 냄새를 가리기 위해 향기 나는 물을 듬뿍 바르곤 했다. <77~78쪽>
라프켄체 사람들에 따르면, 낯선 인간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눈에 우람한 덩치를 가진 나, 달빛 향유고래가 할머니 고래 넷보다 훨씬 더 탐나는 사냥감으로 보일 것이 틀림없었다. <83쪽>
나는 허파에 공기를 가득 채우고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간 다음, 속력을 높여 작은 보트 바로 옆으로 솟구쳐 올랐다. 온몸이 공중에 떴다 떨어지면서 일으킨 거대한 파도와 물보라로 인해 결국 보트는 뒤집히고 말았다. <85쪽>
옆구리 쪽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작살이 내 몸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다시 잠수할 수밖에 없었다. 내 살에 박힌 작살을 빼내기 위해 몸을 뒤흔들면서 바닷속 깊은 곳으로 내려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고래잡이배 선원들이 내게 극심한 통증을 일으켜 힘을 빼기 위해 작살의 고리 끝에 묶인 밧줄을 계속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95쪽>
그들은 밧줄을 이용해 혹등고래를 뱃전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갓 태어난 새끼 고래도 비극적인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선원들이 어미 혹등고래와 새끼 고래의 몸을 토막 내고 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혹등고래와 새끼 고래의 피가 뱃전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면서 바다를 벌겋게 물들였다. <95~96쪽>
인간들이 무섭게 몰려올 거야. 배를 타고 오면서 고래, 돌고래, 바다표범, 물범, 바다코끼리, 펭귄, 갈매기를 닥치는 대로 죽일 거라고. 바다에 사는 모든 것들은 결국 인간들의 가마솥에 들어가 지방과 기름으로 변해버릴 거야. <109쪽>
세풀베다가 꿈꾸는 수평선 너머의 세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곳일까? 그것은 그의 문학 세계 전반을 관류하는 주제, 즉 <자유>가 거대한 물길처럼 흐는 세계가 아닐까? 자유란 <최고의 가치>인 동시에, <가장 순수하고 이상적인 것>이고, <그런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할 때 비로소 우리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134쪽, 옮긴이의 말>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펴냄 | 144쪽 | 15,800원
[정리=이자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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