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60년대 초. 여성이 남역과 여역을 모두 연기하는 여성국극이 흥망의 기로에 놓인 그 시절, 한 소년(박수빈 배우)이 집을 떠나 여성국극단의 문을 두드린다. 소년이지만 여성으로 태어난 그에게 ‘남성을 연기’할 수 있는 여성국극의 ‘남역 자리’는 마침내 숨 쉴 수 있는 새로운 집으로 비춰졌으리라. 하지만 극단을 대표하는 ‘니마이’(여성국극의 남자 주연 역할) 배우이자, 권력의 정점인 ‘왕자’(이미자 배우)가 존재의 발목을 잡는다. 소년이 ‘예쁘장’하게 생겼다며 “부채질”하는 여자 역을 권하고, “여자나 남자나 결국 치장”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런데도 여자 역만 아니면 다 된다고 우기던 이 소년. 이후 ‘산마이’(바람잽이 역)와, ‘가다끼’(악역)라는 남역을 자기 식대로 소화하며 동료들에게 점차 인정과 ‘사랑’을 받게 되고. 그렇게 남역의 ‘정수’라는 니마이의 꿈과 점점 가까워지던 그때, 소년의 꿈에 병든 왕이 나타나 말을 걸기 시작하는데...
지난 11일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개막한 ‘벼개가 된 사나히’는 드라마로 방영된 ‘정년이’를 통해 다시 조명된 장르인 '여성국극'이다. 하지만 소수자적인 감각을 무대 위에 올려왔던 구자혜 연출, 그리고 현실을 소환하는 고연옥 작가라는 크레딧에서 알 수 있듯 전통적 여성국극을 재현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젠더퀴어 소년을 여성국극의 롤에 풀어놓으면서 기존의 여성국극이 요하던 성별 이분법적 형식에 질문을 던진다. 이는 전통적인 여성국극을 향한 지적인 동시에, 마찬가지로 역할 롤에 갇혀 사는 세계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사회라는 여성국극,
성별 이분법을 요란하게 교란하기
남역을 선망하던 이 소년은 그러나 기존의 ‘남성적’인 연기와는 또 다른 감각을 자아내며 성별 이분법이라는 낡은 세계를 교란한다. 때문에 이를 구현하는 배우의 역할이 중요한데, 여성국극제작소의 대표이자 오랫동안 여성국극의 동시대적 의미를 고민해온 박수빈 배우의 연기와 절창이 몰입감을 주도한다. 이제 막 꿈을 꾸기 시작한 소년의 천진함과 야망, 경쾌함, 역할들마다 달라지는 퀴어적 텐션, 그리고 가부장적인 질서 앞에 고뇌하는 존재를 유랑한다.
‘니마이’의 꿈과 가까워지며, 존재적인 갈등을 겪는 소년의 내면을 은유해내는 듯한 ‘꿈속 왕과의 대화’는 그 자체로 한편의 우울한 시이자, 권력관계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성별이분법의 허상을 비추는 듯하다. 이를 박수빈 배우와 함께 구현하는 여성국극 원로인 이미자 배우는 아마 우리가 이제껏 본 수많은 사극 속 미친 왕들의 연기보다 압도적일 것이다. 마치 상처받는 것이 소년이 아닌, 우리 자기 자신으로 느껴질 정도로.
설화 속 퀴어와 '죽지 못한' 유령들
어느 정도의 경쾌함이 참여하는 1막과 달리, 2막은 조금 더 적극적인 관객의 해석이 필요하다. 1막이 끝난 후 소년이 니마이로 등장하는 '여성국극'을 보여주는데, 무대 배경을 비롯해 연출진은 이 극을 ‘리얼’로 느껴지게 할 의도가 적극적으로 없다. 무대에 올리는 극은 ‘아랑애사’다. 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밀양에 갔다가 남성에게 살해당한 뒤, 시체로 버려진 젠더폭력 피해자. 아랑의 이야기를 담은 '아랑 설화'를 토대로 다시 쓴다.
왜 아랑 설화였을까? 이는 여성국극의 주요 레퍼토리는 아니지 않나. 아랑은 원귀가 되어 신임 부사의 꿈에 등장해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그들은 죽은 여자를 보고 무서워서 죽어버린다. 이에 밀양으로 가려는 자가 없자, ‘이 상사’라는 사람이 자원해 부임한다.
소년이 이 상사를 연기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남성 부사들과는 다르다. 죽은 자를 타자화해 지레 놀라 죽지 않고 이야기를 듣고 고통과 연결된다. 시체를 꺼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지게 한다. 비약하자면 앞전의 인물들과 달리, 그는 한국 설화 속의 ‘퀴어적’인 존재 아닐까. 죽음을 목도하고 죽음 곁에 있고 시체를 꺼내는 존재.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밀양 아리랑의 가사와 연결되며 그렇게 존재 증명의 외침이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방법, 연결
2막의 ‘아랑애사’를 통해 극은 결국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담으며 여성국극이 동시대에 표현할 수 있는 경계를 확장한다. 죽어버린 아랑을 목 놓아 부르는, 주류 레퍼토리와는 다른 '니마이'의 모습도 여러 생각 거리를 남긴다.
이처럼 공연은 주인공 ‘소년’ 혼자가 아닌 다양한 주체를 소환한다. 2막의 아랑과 같은 죽은 자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여성국극 세계에서 ‘공주’라는 제한된 역을 소화해온 ‘공주’(황지영 분)의 서사와 연기가 귀하다. 드라마 ‘정년이’가 적극적으로 누락했던 여성국극 안팎의 퀴어 서사와 여성의 존재적 탐구를 엮어 보여준다. 나아가 2막에서는 공주가 ‘산마이’이자 죽임 당하는 버들을 연기하는 것도 관람 포인트. 싱어송라이터 이지영이 분하는 ‘꼬마’는 극에 꼭 필요한 존재다. 국악과 결합한 경쾌한 EDM과 R&B(?)라는 ‘퀴어’적인 조합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그는, 후에 곡소리와도 같은 절창으로 극을 가득 채운다.
극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 관객으로 하여금 극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가에 대한 질문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애초에 완전한 '재현'을 꿈꾸지 않는 극에서, 눈에 잘 보이는 매끄러운 연결점을 갈구하기보다 다양하게 해석해보는 것도 관극 경험일 것이다. 소수자 혐오, 젠더 폭력을 암시하는 장면, 성적인 장면이 등장하지만 ‘노출’은 없다. 전통적인 여성국극을 즐기기보다, 여성국극에 대한 이야기 자체를 즐기고 고민하는 사람, 새로운 공연 경험을 원하거나, ‘보이지 않는 사람’이란 표현에 동한다면 관람을 권한다. 수어 통역과 한글 자막이 제공되며, 공연은 오는 19일까지.
[독서신문 유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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