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가 김선형의 파랑, 세상을 여는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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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가 김선형의 파랑, 세상을 여는 색

더 네이버 2024-12-30 11:11:32 신고

파랑은 하늘의 색이자 바다의 색. 그러니 누구나 저마다의 파랑을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2006년 파랑을 재발견한 이래, 파란색만으로 작업을 이어온 작가 김선형처럼. ‘가든 블루’ 또는 ‘부귀청화’ 연작으로 알려진 동양화가 김선형은 파랑 하면 떠오르는 작가다. 그는 한지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며, 주로 울트라마린 컬러를 사용한다. 작품에 자연을 담아서일까, 혹은 한지의 번짐이 친숙해서일까. 선명하고 강렬한 색이지만 실제로 작품을 보면 담담한 멋도 지녔다. 


작가는 2007년부터 ‘가든 블루’ 작업을 시작했다. 계기는 잘 알려져 있다. 2006년 겨울, 전남 구례의 화엄사를 방문한 그는 저녁 무렵 절의 종이 울리자 새가 날아가는 풍경을 보았다. 그때의 쨍한 하늘색이 각인된 이후 푸른색을 사용했다고. 하늘이 청명하게 푸른 겨울날, 경기도 성남의 운중화랑을 찾았다. 그가 ‘마더 갤러리’라 부를 정도로 인연이 깊은 곳이다. 화랑에서는 그룹전 <윈터 쇼(Winter Show)>가 열리고 있었다. 김선형은 큰 하트처럼 보이는 신작을 처음 공개한 참이었다.


전시를 구경하고는 서울 자양동에 위치한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공간은 온통 파란 그림과 물감으로 가득했다. 벽과 바닥에 파란 물감이 튀고 흐른 흔적 때문인지 꼭 거대한 액션페인팅이나 설치미술 같았다. 그림만큼이나 물건도 많았는데, 대화 도중 그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가위를 보여줬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손톱을 깎아주고 바느질할 실을 자르기도 했던 가위다. 선대의 손재주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는지 그가 직접 천을 덧대어 꿰맸다는 파란 담요가 눈에 띄었다.


명함을 건네며 본 작가의 손끝에는 파란 물감이 남아 있었다. 씻어내도 씻기지 않는 흔적은 그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듯했다. 지금처럼 매일 그림 그리는 한 그의 손끝은 늘 파랗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파랑의 작가에게 그보다 영광스러운 훈장은 없으리라.

1 대나무 숲을 그린 대형 작품. 가까이서 보면 작은 새가 숨어 있다. 2 ‘잎’ 연작부터 기명절지화 등 작가의 대표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운중화랑의 그룹전 전시작은 어떻게 결정했나?
신작인 잎 시리즈를 처음 전시했다. 요즘 잎에 집중하고 있는데, 자연의 개별적인 요소를 확대해 그리는 작업에 관심이 크다. 식물의 싹이나 떡잎을 들여다보면 하트 형태가 많다. 잎이 하트로 보이는 애매한 경계를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하트로 이해해도 관계없다. 작품은 작업실 안에서는 작가의 것이지만 밖에서는 공공의 것, 보러 온 사람의 것이다. 


전시작을 보니 천을 덧대어 면을 분할한 기법이 눈에 띈다.
서양화는 구조와 구성이 단순하지 않다. 조형적 구성에 힘을 쏟고 구조적 측면을 중시한다. 시각적 다양성을 추구한 결과 여러 사조가 생겨나고 재료도 발전했다. 반면 동양화는 사의적이라 의미에서 출발한 작품이 많다. 그래서 서양화보다 구조가 약한 느낌이다. 현대는 무엇이든 단발적이고 감각에 집중하는 시대다. 시각을 사로잡을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이와 천을 겹쳐 조각보처럼 만들어보았다. 나는 대학 때부터 동양화 표현이 지루했다. 물감을 짜서 쓰면 되지, 먹을 왜 갈아야 하나. 하지만 동시에 동양화의 깊이에 경도된 시기도 있었다. 그래서 여러 실험을 통해 물성의 조화로움을 느끼고 싶었다. 이러다 금세 다시 맨 종이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화판이 사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작품도 있다.
그림을 사각형으로 인식하는 것도 시각적 착각일 수 있다. 사람 얼굴도 비대칭 아닌가. 사각형의 한쪽을 약간 틀어서 사람들이 얼핏 보면 틀어진 걸 모르다가 유심히 보면 알아차리도록 의도했다. 전시장에 있다 보면 사실 작품을 자세히 보는 관람객이 많지 않다. 또한 요즘 작은 그림은 인테리어의 일부로 소품화되었다. 그림을 보고 좋다고 느끼면 바로 ‘어디 걸지?’라고 먼저 생각한다. 그러니 작은 그림을 약간 비틂으로써 공간을 새롭게 들여다보기를 바랐다. 

운중화랑에서 전시한 신작 ‘잎’ 시리즈와 김선형 작가. 여러 소재를 덧대어 구성에 변화를 꾀했다.


그렇다면 작가만의 관찰 방식이 궁금하다.
예전부터 스케치는 하지 않았다. 물론 아름다운 형태를 보면 나도 남기고 싶다. 하지만 휴대폰 카메라로 모든 걸 저장할 수 있기에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들여다보지 않는다. 모든 걸 기억하려는 욕심은 결국 무엇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다. 내가 자연에 도취된 이유는 어느 순간도 같지 않아서다. 자연은 살아 있기에 매 순간 변한다. 그걸 깨닫고 느끼는 것이 나의 관찰법이다. 풍경도 찰나일 뿐이니 변화 가능성을 총체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나아가 화가의 몸짓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잎사귀를 그린다면 잎이 흔들리듯 팔을 떨면서 그려야 한다. 


그림을 그릴 때 동적으로 움직이나 보다. 
그림 그리는 사람뿐 아니라 음악가나 글 쓰는 사람 등 작가라면 공통적으로 자연스러움이 중요하다. 중력을 따라 너울너울 움직이는 춤사위처럼 그림 그릴 때 자세도 자연스러워야 한다. 


스케치를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케치를 작업실에서 옮겨 그리는 과정에 처음 감성이나 느낌, 기운이 다 빠져버린다. 평소 눈으로 먹고산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본 것들이 내 안에서 돌아다니고 헝클어지다 작업실에서 쏟아져 나온다. 처음 느낌을 온전히 전달하고 싶기에 스케치를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스케치를 토대로 그리면 자꾸 다듬게 된다.


기명절지화처럼 돌과 화병, 꽃을 그린 작품 연작은 구도가 존재한다. 머릿속에서 구도를 잡은 뒤 작업을 시작하는지?
머릿속에 구도를 잡고 그려봤지만 늘 실패했다. 물론 내 안 어딘가에 나름의 배치가 존재하기에 바로 그릴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명절지화는 돌, 화병, 꽃의 순서는 똑같지만, 한 번은 수국을 그린 적이 있다. 어느 가을 수국을 선물 받아 옥상에 두었는데 꽃이 지고 매달려 있는 모습이 아련하고 멋있었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소재를 끌어낸다. 화면 어디서든 시작해 그리다 보면 공간이 절로 만들어진다. 옛날 문인화도 이렇게 그렸을 것이라 생각한다. 

김선형 작가가 손수 꿰맨 담요. 2 파란색으로 물든 화판이 곳곳에 쌓여 있다. 작가가 쭉 사용해온 울트라마린 물감.


여름에는 반바지만 입고 작업한다고 들었다.
작업실에 오면 나를 속박하는 것에서 벗어나 최대한 자유롭고 싶다. 오늘은 손님이 왔으니 히터를 켰지만 평소에는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그냥 지낸다. ‘좋은 컨디션’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인위적인 상태다. 추울 때 곱은 손에서 나오는 붓질이 또 있거든.


그렇다면 작업할 때 음악을 듣나?
아침에 작업실에 도착해 애플뮤직을 열어 느낌대로 음악을 재생한다. 클래식도 듣고 칠아웃 플레이리스트나 컨트리, 록을 듣기도 하고. 하지만 몰입하면 음악이 들리지 않는다. 음악은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는 역할일 뿐 나는 나의 일을 하니까.


2006년 구례 화엄사에서의 경험을 계기로 파란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사실 당시에는 색을 느끼지 못했다. 범종 소리와 겨울의 쨍한 공기, 그때 흐른 강한 느낌만 남았다. 범종각 맞은편 산이 검게 보였는데, 하늘의 짙푸른 색이 감색, 남색, 프러시안블루, 울트라마린 계통이었다. 그처럼 진한 색 하늘이었다는 건 나중에 인식했다. 이전에 좋아했던 색은 마젠타, 시에나, 무거운 갈색, 와인 컬러 등 붉은 계통이다. 지금도 좋아한다. 계속 붉은색으로 작업했는데, 그날 이후로 푸른 물감을 사용하고 있더라. 시간이 흐른 뒤 그때의 인상 때문에 변화했으리라 떠올린 것이다. 그러면서 화엄사에서의 시간을 곱씹으니 파란색은 경계의 색 같았다. 밤으로 드는 때, 아침으로 올 때, 세상이 열릴 때의 색깔. 평소 좋아하는 붉은색은 오히려 좋고 싫은 경계가 뚜렷하다. 반면 푸른색은 좋아하던 색이 아니라 더 넓게 수용할 수 있다. 


어떤 물감을 사용하는지도 궁금하다.
처음에는 진한 프러시안블루를 썼다. 사람들이 ‘코발트색 푸른 하늘’이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는데, 코발트는 파스텔조의 탁색이다. 그런 색은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러다 찾은 색이 울트라마린이라는 아주 짙푸른 색이다. 초기에는 프러시안블루가 섞인 푸른색을 쓰다 채도 높은 울트라마린으로 옮겨왔다. 동양화가가 왜 울트라마린을 쓰냐고 묻는다면, 한국 재료의 수준이 높지 않다. 물감의 경우 완결성이 떨어진다. 텁텁한 유화물감을 싫어해서 대학 때부터 수용성 물감을 찾다 아크릴 물감에 정착했다. 지금도 그때의 미제 물감을 쓰는데, 아크릴 물감 베이스에 안료를 섞는다.

역동적인 작업 풍경이 상상되는 작업실.


물감을 바꾼 것과 달리 한지는 쭉 사용해왔다.
한지는 독보적인 종이다. 중국 종이인 화선지는 산성지이고 한국의 한지는 중성지다. 한지는 공기 중에서 산화하지 않는다. 즉, 삭지 않는다. 하지만 제대로 한지를 만드는 장인들이 사라지고 있다. 한지는 나무 발로 종이 섞인 물을 떠내야 하는데 한지 발을 못 만든다고 한다. 전주의 장인들이 돌아가신 뒤 수급이 어렵다고 하더라. 한국의 좋은 재료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목도하는 상황이다. 구하기 어렵고 비싸지니 저변이 자꾸 줄어든다. 


한지에서 물감이 번지는 효과가 작품의 중요한 특성인데.
천이나 캔버스에 그릴 때도 어떻게 하면 한지처럼 번지게 할지 고민한다. 대개 그림을 바닥에 두고 그리는데, 종이가 충분히 물에 번지도록 기다린다. 일차적으로 사람이 그렸지만, 물이 스며들고 번지고 마르는 동안 이차적으로 재료가 완성하는 셈이다. 그렇게 작업하기에 종이는 아주 좋은 재료다. 물감의 양을 어느 정도 흡수하고 뱉어낼 수 있는 유기성을 지녔다. 


1년에 364점을 그린다고 할 정도로 왕성하게 작업하고 있다.
화가는 눈으로 빌어먹는 직업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이왕 빌어먹는 것 멋있게 빌어먹으려고. 그림은 결코 저렴하지 않다. 내 그림을 사는 사람이 나를 두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길 바란다. 불과 4, 5년 전까지만 해도 서명한 그림이 20~30%뿐이었다. 습작에 누가 사인을 하겠냐 생각했는데, 이제부터 잘 관리할 계획이다.


2025년의 바람이나 계획이 있다면?
매일매일이 새로우니 굳이 새해가 왔다고 해서 새로워져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2025년에는 연구년으로 대학 일을 한 해 쉬기로 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리하고 싶다. 그리고 아들이 2024년 입대해서 지금 백령도에 있다. 나더러 백령도에 가라는 자연의 계시 같다. 그러니 가서 그곳의 사계를 봐야겠다. 그림은 늘 그리듯이 그릴 테고, 몇 해 전 건강이 악화된 적이 있어 건강을 잘 돌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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