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보드 제조사로 익히 알려진 애즈락(ASRock)이 파워 서플라이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몇 년 전부터 ASUS, GIGABYTE, MSI를 비롯한 주요 하드웨어 제조사들이 파워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데, 애즈락의 합류를 기점으로 이 시장에서도 글로벌 브랜드들의 각축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주요 브랜드가 파워 시장에 도전하는 것은 몇 가지 원인 때문일 것으로 풀이되는데, 아마도 가장 큰 원인은 PC 수요의 둔화 때문일 것으로 예상된다.
예전에는 약 2년 주기로 교체 수요가 발생하던 PC는 현재 6~7년을 사용해도 불편을 느끼지 못할 만큼 쾌적하다. 고사양 게임을 즐기는 소수의 마니아가 아닌 이상 PC의 교체 주기가 상당히 길어진 것.
기업들은 둔화되는 수요에 대응해 매출을 지키기 위해 하드웨어의 가격을 높이는 전략을 구사해 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전략은 PC 시장의 수요 둔화를 더욱 가속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300만원짜리 그래픽카드, 200만원짜리 프로세서, 200만원짜리 메인보드가 합당한 가격인지 의문을 던져 보어야 할 때가 아닐까?
두 번째는 진출할 만한 시장이 파워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요 하드웨어 제조사는 이미 메인보드, 그래픽카드를 넘어 모바일 게임기, 초소형PC, 외장형 그래픽카드, 심지어 케이스까지. PC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카테고리로 영역을 확장해 왔다. 이제 남은 것은 파워 서플라이 뿐이다.
# 남다른 전략, 시작부터 거창한 애즈락
하지만 파워 시장은 여타 하드웨어와 다르다. 요구하는 기술적 수준이 높지 않아 접근성이 좋지만, 모든 브랜드가 마지막에야 손을 대기 시작했을 만큼 만만치 않다. 최근 파워 서플라이 브랜드가 크게 늘어난 반면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브랜드는 여전히 소수인 것만 보아도 그렇다. PC 전체에 전력을 공급하는 제품이기에, 소비자는 파워에 대해서는 그 어떤 하드웨어보다 보수적으로 접근한다.
난다 긴다 하는 브랜드가 파워 시장에 더욱 신중론을 펼치는 이유 역시 이에 있다. 자칫 겁 없이 덤볐다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모르기 때문. 특히, PC의 하드웨어가 망가지는 문제가 발생하면 소비자는 파워부터 의심하고 본다. 심지어 하드웨어에 문제가 생겨 고전압이나 고전류가 시스템에 발생하면 이를 막기 위해 파워 서플라이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예도 잦다. 원인은 다른 데 있는데, 그럼에도 하드웨어가 망가지거나 파워의 퓨즈가 끊어지는 상황이 오면 이 모든 증상이 파워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딱 좋다.
때문에 파워 시장에 진출하는 대다수의 브랜드가 시장의 주력이 되는 몇몇 제품을 먼저 출시해 위험성과 안정성을 확인한 후 서서히 라인업을 늘려가는 전략을 사용한다. 비교적 간단한 구조라 해도, 안정성을 위한 노하우는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되므로 직접 설계하기 보다 검증된 제조사의 기본 모델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색깔을 입히는 전략도 사용한다. ADATA, ASUS, GIGABYTE, MSI 등 주요 브랜드 대부분이 이 전략에 따라 하나둘씩 제품을 늘려가고 있다.
그런데, 애즈락은 역시 애즈락이다.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시도에도 망설임이 없던 브랜드의 탄생 시절처럼 파워 시장에서도 모 아니면 도 식의 과감한 전략을 꺼내 들었다.
애즈락은 파워 시장의 진출을 알림과 동시에 4가지 시리즈, 17종의 제품을 동시에 공개했다. 실로 파격이라 할 만큼 공격적이고 거침이 없다. 이 정도 라인업이라면 시소닉이나 마이크로닉스, FSP처럼 오랜 기간 시장을 공략하며 촘촘한 라인업을 완성해 온 기존 플레이어와 정명승부를 벌여볼 만한 수준이다. 파워 시장의 진출과 함께 모든 가격대의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명확한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특정 브랜드를 선호하는 소비자는 하나의 브랜드로 PC 대부분을 꾸미고 싶어한다. 이 분야에서는 ASUS가 가장 앞서있다 할 수 있는데, ASUS를 선택하면 메인보드와 그래픽카드, 파워와 케이스까지 통일된 디자인 언어가 적용된 제품으로 ‘깔맞춤’ 할 수 있다.
아직 케이스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진 않지만, 애즈락 역시 이에 준하는 포트폴리오를 갖추게 된 셈이다. 최상위 라인업인 80PLUS TITANIUM 등급의 타이치(Taichi) 시리즈는 메인보드의 디자인 언어를 대거 채용해 타이치 시리즈 메인보드 사용자의 눈길을 사로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소음에 대한 인증도 별도로 제공하는 사이베네틱스의 LAMDA A+ 등급을 받은 극소수의 제품인 만큼 정숙성에서도 가장 만족스러운 수준에 도달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1300W와 1650W 두 모델이 출시된다.
마니아의 수요가 집중될 것으로 예상되는 팬텀 게이밍(Phantom Gaming) 시리즈에는 80PLUS GOLD 인증의 5모델이 출시된다. 750W부터 1600W까지 선택의 폭이 다양한 것은 물론, 팬텀 게이밍 시리즈 메인보드와 동일한 퍼플 컬러를 메인으로 차별화된 디자인을 보여준다.
소음은 사이베네틱스 LAMDA A 인증을 받았다. 마니아들이 파워 서플라이에서 발생하는 소음에 꽤나 민감하다는 점을 잘 간파하고 시작부터 이에 대해 철저히 대비한 모습이다. 이만한 수준의 소음도라면 시장에서 인정받는 극소수 파워 서플라이와 비교해도 소음도에서 부족함이 전혀 없는 수준이다.
메인스트림 시장을 위한 스틸 레전드(Steel Legend) 시리즈 역시 80PLUS GOLD 인증과 사이베네틱스 LAMDA A 인증을 통과했다. 메인보드와 같이 블랙을 기본 컬러로 스타일을 완성했다. 650W부터 1000W까지 총 4모델이 출시된다. 아무래도 애즈락은 파워 서플리이 시장이 브론즈, 골드, 티타늄 중심으로 재편될 것으로 예상하는 분위기이다. 하드웨어가 요구하는 전력량이 늘어나는 것과 동시에 골드 급의 파워 서플라이가 메인스트림까지 커버할 것에 대비해 미리 라인업을 짠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가성비 위주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시장을 위한 챌린저(Challenger) 시리즈에는 80PLUS GOLD 등급의 세 모델(650, 750, 850W)와 브론즈 등급의 세 모델(550, 650, 750W)가 출시된다. 처음 시작하는 브랜드 치고는 꽤나 촘촘한 라인업을 구축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한국 시장, 만만히 보시면 안 됩니다!
초반에도 언급해지만, 시스템에 어떤 트러블이 발생하면 소비자는 으레 파워 서플라이부터 의심하기 시작한다. 특히, 이제 막 시작하는 브랜드라면 아무리 메인보드 시장에서 명성을 쌓아왔다 해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 이 시장이다. 때문에 한국 시장에서 파워 서플라이로 브랜드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싶다면 몇 가지를 당부하고 싶다.
첫 번째는 인내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메인보드만큼 제작이 어렵지 않은 제품이라 생각해 쉽게 생각하면 큰 코 다치게 된다. 한국에서는 더 그렇다. 파워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충분한 검증이 끝난 후에야 시장이 반응하는 보수적인 시장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두 번째는 소비자를 무시하지 말라는 점이다. 한국의 소비자는 개개인이 하드웨어에 대해 가진 지식의 수준이 굉장히 높은 편이다. 어설픈 기술적 용어 몇 가지로 소비자를 현혹할 수 없는 시장이다.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단 한 번의 말장난이 그 모든 노력을 무너트리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소비자에게는 정직해야 한다.
세 번째는 정면돌파만이 답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PC 하드웨어는 표준에 따라 만들어지지만, 예상 외로 특정 제품과 제품 사이에 예기치 않은 트러블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럴 때 책임을 회피하거나, 타사의 탓으로 돌리는 전략은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 시장에서는 참고할 만한 브랜드가 있다. 바로 시소닉과 마이크로닉스. 두 브랜드는 보급형과 고급형 파워 서플라이 시장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하는 브랜드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두 브랜드에는 묘한 공통점도 하나 있다.
마이크로닉스나 시소닉이라 해서 어찌 부침(浮沈)이 없었겠는가?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위기를 나름의 기회로 활용할 줄 알았다. 마이크로닉스는 출시 제품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재빠른 상황 파악과 함께 해당 제품을 모두 회수해 폐기하는 과감함을 선보인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이미 제품을 구입한 소비자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시소닉 역시 비슷한 일을 겪었다. RTX 30 시리즈 출시 당시 거의 모든 브랜드에서 셧다운 현상이 발생했지만, 골드 이상 시장에서 압도적인 판매량을 가졌던 시소닉은 상대적으로 그 발생 빈도도 높았다. 이에 국내 공급사 맥스엘리트는 문제의 발생 소지가 높은 특정 시기의 생산 제품을 파악한 후 해당 제품을 모두 새 제품으로 교체해 주었다. 파워 서플라이의 문제로 기인하는 현상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소비자 보호를 위해 선제적으로 리콜을 진행한 셈이다.
네 번째는 한국 소비자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다양한 아이디어가 넘치는 한국의 마니아들과 소통하는 채널을 확보하면 향후 오랜 기간 제품에 대한 풍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아울러 우리 제품을 소비자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시장이 전 세계 시장의 바로미터가 되고 있는 현재에 한국 소비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확보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다.
애즈락은 첫 번째 전략을 잘 세운 느낌이다. 여타 브랜드가 이 시장의 위험성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게, 가격 위주의 제품으로 대응한 것과 달리 애즈락은 시작부터 모든 가격대에서 기존의 지배자들과 경쟁하겠다는 당당한 자세가 마음에 든다.
파워가 아무리 보수적인 시장이라 해도 메인보드·그래픽카드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브랜드들이 보급형 파워 서플라이를 이용해 돌다리 두드려 보듯 시장을 탐색하는 것도 조금은 아쉬운 행보다. 애즈락처럼 과감하게 도전하면 소비자도 분명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일 게다.
덕분에 타이치, 스틸 레전드 등 시리즈마다의 개성과 디자인을 뽐내는 애즈락의 하드웨어를 파워까지 확장할 수 있게 됐다. 애즈락을 선호하는 마니아라면,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을까?
생산전략도 잘 수립한 느낌이다. 고급형 제품은 FSP 모델을 기반으로, 보급형 모델은 HEC 모델을 기반으로 커스터마이징 한 것으로 예상된다. 해당 부분은 완전하게 전해지고 있는 정보가 없어 어쩌면 애즈락이 직접 설계한 제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파워란 제품이 보기만큼 만만하지가 않다. 따라서 검증된 제조사의 검증된 모델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디자인과 기능, 품질을 강화하는 전략은 시장에 처음 도전하는 브랜드로서는 가장 효과적이다.
서두에도 언급했듯,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면 파워는 항상 원흉으로 몰리는 첫 번째 하드웨어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문제를 일으킬 위험성이 큰 하드웨어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파워 시장을 공략하다 보면 언제고 예기치 않은 이슈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때 한국의 소비자는 애즈락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확인하고 신뢰 여부를 결정하게 될 공산이 크다.
그러니 잔머리 굴리지 말자, 그러니 정직하게 대응하자. 정면돌파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한국의 소비자와 두뇌게임을 벌이기 시작한 순간, 이미 잘못한 거다. 이 사실을 잊지 말자.
By 김현동 에디터 Hyundong.kim@weekly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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