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심형 성범죄’ 피해 입던 ‘소녀’와 ‘백치’, 그리고 속물들...음악극으로 돌아온 ‘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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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심형 성범죄’ 피해 입던 ‘소녀’와 ‘백치’, 그리고 속물들...음악극으로 돌아온 ‘백치’

독서신문 2024-12-05 06:00:00 신고

"오늘은 날씨도 러시아 느낌이네요." (- 음악극 ‘백치’ 프리뷰 공연 소개 멘트 중에서.) 지난 11월 27일, 전국에 난데없이 폭설이 내리기 시작한 그날.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를 재해석한 동명의 음악극(극단 피악)의 프리뷰 공연이 열렸다.

무대 위 곳곳에는 앙상하게 마른 겨울나무들이 서 있다. 소설의 배경인 11월 하순을 암시하는 동시에, 빈자와 졸부, 상류 계층의 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지던 1860년대의 메마른 페테르부르크를 상징하듯이. 잠시 후, 사람을 가득 실은 초라한 탈 것이 무대에 오르고, 한 남자가 이를 온몸으로 힘겹게 이끈다. 그 위에 빼곡히 앉아있는 사람의 얼굴은 "희뿌여니 누르스름"하고, 겨울의 바짝 마른 나뭇가지처럼 '영혼 없이' 지쳐있다.

'백치' 공연 연습 장면 [사진=극단 피악 인스타그램]

이 육중한 무게를 견디며 방향을 조정하는 존재가 주인공인 '백치' 미쉬킨 공작(한윤춘 분)이다. 원작자인 도스토옙스키가 진정한 아름다움을 탐구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모델로 만든 인물로 알려졌다. ‘아름다움’이라는 설명과는 달리 옷차림은 남루하다. 당대 비천한 병으로 여겨졌던 뇌전증도 앓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남자에게는 ‘백치’라는 별명처럼 계산 없는 순수함과 사람을 꿰뚫는 통찰력, 그리고 사람을 감화시키는 매력이 있다는 점이다. 상류층 자제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그를 재미있어하는 이유다. 가히 ‘마성의 남자’이지만, 현대의 시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일 것이다.

음악극 '백치' 포스터 [사진=극단 피악]

이상의 설명에 누군가는 벌써 하품을 했을 수도 있다. ‘세속과는 다른 가치를 부각한 지루한 고전’이라며. 하지만 방대한 원작의 줄거리만 건져본다면, 이보다 더 ‘도파민' 넘치는 이야기가 없다. 치정, 살인, 복수, 욕정, 질투, 사각관계, 돈을 매개로 한 '인간 흥정'까지…. 웬만한 주말 연속극도 눈치 볼만한 자극적인 소재들이다.

러시아 원어 연기로 만나는 나스타샤

러시아 배우 아나스타샤 [사진='백치' 인터뷰 영상 캡처]

이를 가능케 하는 존재가 바로 ‘육체적인 미’의 상징인 나스타샤라는 인물이다. 미쉬킨 공작, 그리고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자 불한당인 로고진(이강준 분)이 동시에 나스타샤를 사랑하며 파국이 뒤덮는다. 이번 음악극의 특별함도 나스타샤에게 있다. 미쉬킨 공작이 시종일관 “수수께끼”라고 수사하는 이 인물을 스타니슬랍스키 엘렉트로 극장의 배우 아나스타샤 (Anastasia)가 ‘러시아 원어’로 연기했다.

한국어 대사가 오가는 사이, 나스타샤의 말은 목소리만으로 돌출된다. 무대 양옆 화면에 자막을 보여주지만, 표정과 몸짓에만 집중해 본다면 대사를 이해할 수 없는데도 압도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사실, 자막이 멀어 잘 안 보인다.) 안 그래도 불가해한 존재인 나스타샤를 국내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로 맞닥뜨리게 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그녀를 더욱 타자화하는 행위일까, 혹은 언어를 넘어서는 이해의 영역에 도달케 하려는 실험일까. 해석은 관객의 몫이나, 분명한 건 아나스타샤의 연기는 3시간의 긴 러닝타임에서 번번이 자세를 고쳐 앉게 했다는 것이다.

하이라이트는 나스타샤가 자신을 매개로 벌이는 ‘흥정’의 쇼다. 여기서 나스타샤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대지주인 ‘토츠키의 정부’로 불렸다. 하지만 토츠키는 이제 ‘괜찮은 장가’를 들 생각으로 나스타샤를 ‘처분’하고 싶어 한다. 머리를 굴린 끝에, 그는 지참금 7만 5천 루블을 야심 가득한 청년 가브릴라(진성웅 분)에게 줘서 나스타샤와 결혼 시키려고 판을 짠다. 가브릴라, 그는 ‘자본’을 갖기 위해 눈에 불을 켜는 당대의 속물적 존재다.

판을 깨는 건 나스타샤다. 자신에게 매겨진 가격표를 흔들며, 가격을 새롭게 매겨보라고 말한다. 그러자 로고진(이강준 분)은 10만 루블을 빌려 오고, 우리의 ‘순수’한 공작은 갑작스럽게(?) 유산이 상속됐다며 나스타샤 앞에서 활짝 웃는다. 압권은 나스타샤의 대응이다. 그는 로고진의 10만 루블을 화염에 던진다. 그리고 가브릴라에게 명한다. ‘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돈을 꺼내봐. 그럼 이 돈은 네 거야.’ 차마 불구덩이로 손을 내 밀진 못한 가브릴라는, 기절한다.

나스타샤의 행동은 남성들이 매긴 가격표 자체를 부수며 스스로 주체가 되는 반전이다. 동시에 인간을 가격 매기는 사회에 대한 조롱이다. 그러나 극을 계속 보다보면 관객은 나스타샤의 비범함보다 ‘왔다 갔다’하는 감정적인 모습에 혼란을 더 느낄 것이다. 공작에게 마음이 이끌리면서도, 매번 공작에게서 도망치는 모습처럼.

그 소녀는 왜 ‘정부’가 되었나

하지만 원작 속 전사를 상기하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그가 ‘토츠키의 정부’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릴 적, 집안은 패가망신했다. 부모도, 자매도 죽었다. 보호자도, 거처도 없는 아이 앞에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가 바로 가진 건 시간과 나이밖에 없었을 토츠키다.

토츠키도 처음에는 연민으로 아이를 지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아이가 “장차 뛰어난 미인이 될 게 확실한 소녀”로 성장해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꾼다. 가정부를 비롯해 최고의 교육 환경과 물품으로 그녀를 양육한다. 그렇게 나스타샤가 숙녀로 성장하자 1년에 몇 번 그녀를 방문한다. 이제 사람들을 나스타샤를 이렇게 부른다. “토츠키의 정부”, 그리고 “더러운 여자”라고. 원작에 구체적인 연령대와 장면은 적혀있지 않지만 ‘환심형 성범죄’와 다를 것 없는 과정이다. 이 모든 사건을 겪은 생존자의 불안한 내면은 시간을 들여 깊이 있게 봐야하는 부분이다. 
(*이상의 쌍따옴표 속 멘트는 모두 문학동네 판 '백치'-김희숙 번역- 인용)

‘아름다운 백치’란 존재하는가

'백치' 공연 연습 장면 [사진=극단 피악 인스타그램]

음악극은 난해하다. 당연하다. 애초에 원작이 난해하니까. 하지만 3시간 동안, 원작의 핵심적인 질문과 감정을 관객이 떠올리고 느끼게 해준다. 인물의 감정뿐 아니라 사회적 배경에 따른 다양한 인물들도 감상 포인트다. 자본주의가 막 유입되며 빈부격차가 극심해진 러시아의 모습에 지금의 한국사회를 비춰보게 한다. 많은 음악이 나오진 않지만 나스타샤, 그리고 로고진의 노래가 감정을 울리는 힘도 좋다.

하지만, 원작이든 연극이든 떠오르는 의문은 있다. 많은 이들이 도스토옙스키가 이 작품으로 진정한 아름다움을 탐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끝도 없이 나스타샤를 “수수께끼”처럼 묘사하는 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공작은, 정말로 나스타샤의 마음을 이해했던 걸까. 나스타샤에 대한 마음은 사랑이 아닌, 환상과 무지에 기인한 숭앙과 부담스러운 찬양, 또 연민이 아니었나. 그런 그를 아름다운 존재라고 볼 수가 있나. 

어쩌면 그래서 나스타샤라는 문제적 인물을 표현할 수 있는 건 (러시아어를 모르는 관객에 한해) 오직 이해할 수 없는 러시아어 대사인지도 모른다. 대사가 아닌 목소리로, 목소리를 넘어 음악과 몸짓으로 다가오는.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까지 질문을 안겨주는. 공연은 오는 8일까지다.

[독서신문 유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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