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북 = 강선영 기자] 이경란의 소설에는 종종 시간의 압력을 받지 않고 아예 시간이 고여 있는 듯한 장소가 등장한다. 그 장소들은 이를테면 현실 속의 비현실, 아니면 사이공간 혹은 ‘낀 곳’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 밖에는 꽃과 노래'와 '성북동의 달 없는 밤'은 시간이 축적되지 않고 연속적 흐름이 끊긴 공간, 그래서 사물과 인간들에게서 시간의 흐름이 지워져버린 (공간 아닌) 공간을 담아내고 있다.
'마을 밖에는 꽃과 노래'의 주요 공간인 대숲은 자갈말(자갈마을)과 사막 사이를 이어주는 통로이자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넘어가는 문지방 같은 장소로 설정되어 있다. 그곳은 외부인에게 열려 있지만 어느 누구도 머무르지 않는 그들(오래된 사물 같은 죽지 않는 노인과 사내아이를 낳아 기르지만 여전히 아이인 ‘아이’)만의 폐쇄된 공간이기도 하다. 소설은 가게 앞 대나무 꼭대기에 걸린 붉은 천과 흰 천 조각을 통해 그곳이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점쳐주는 무속적 공간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지만, 분명한 것은 소설 속 ‘대숲’은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과는 다른 질서와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이질적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이경란 소설은 사물을 중심으로 인간 존재에 접근하는 사물 중심적 관점을 제시하고 사물과 세계에 대한 한 점 꾸밈없는 사실적 묘사를 통해 이 세계와 사물을, 그리고 인간 존재의 면면을 새롭게 드러낸다. 이경란 소설이 형식의 혁신이나 언어의 실험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는데도 참신하고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물들의 주관적 정서나 감정을 과장되게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사물에 대한 꼼꼼하고 성실한 기록을 통해 사물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감정과 정동을 천천히 희미하게 퍼뜨리는 이 거꾸로 된 소설 작법이야말로 이경란 소설의 새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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