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건호의 예술의 구석] 감추느라 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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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건호의 예술의 구석] 감추느라 혼났다

문화매거진 2024-08-27 11:34:27 신고

▲ 감추느라 혼났다 / 그림: 윤건호
▲ 감추느라 혼났다 / 그림: 윤건호


[문화매거진=윤건호 작가] 붓이 무거운 요즈음, 사각사각 연필을 깎고, 슥삭슥삭 그리는 시간이 즐겁고, 영감이 넘쳐나도 막상 캔버스 앞에 앉으면 붓이 쉽게 들리지 않는다.

그림을 완성해가는 단계에서 붓을 들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관찰하고 스케치한 세상이 어떤 색인지, 어떤 형상으로 완성될지 4K 풀컬러로 점점 더 선명하게 시각화된다. 내가 잘 해냈는지, 멋지게 표현했는지 세상에서 가장 먼저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 바로 붓을 드는 그때인 것이다. 그런 순간이 두렵기도 해서, 스케치만 한 장 두 장 쌓여간다. 잘해내고 싶은 욕심이 붓에 얹혀 무겁기만 하다.

그러다 애꿎은 연필만 만지작거리며 스케치를 반복하다 보면, 보기 싫은 모난 선과 숨기고 싶은 부족함들이 종이를 채운다. 그렇게 종이에 가득 찬 부족함이 결국 눈에 띄게 되면, 짜증스러운 마음에 휘갈겨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휘갈기고 나면, 신기하게도 붓은 점점 가벼워진다. 이게 바로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사의 순리인가 보다.

손에 쥔 붓을 보며, 이런 무거움을 나만 겪는 것 같아 자책하던 때가 떠올랐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렸던 ‘툴루즈 로트렉전’에서의 기억이다. 초입의 화려한 포토존을 지나 그의 일대기를 읽으며, 그 당시의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마음이 뒤숭숭할 때 전시장을 찾는 습관 때문인지, 첫 번째 섹션에 도착했을 때도 큰 기대는 없었다. 

무미건조하게 들어선 그 섹션은 연필 스케치들로 채워져 있었다. 포토존에 이어 이렇게 광활한 스케치존이라니, “원화 반입이 많이 힘들었나…” 나지막이 내뱉었다. 퉁명스레 툴툴거리는 것도 잠시, 내 심정은 이내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흑백 연필로 휘갈긴 스케치들에는 폭죽 같은 화려함이나 황홀한 아름다움은 없었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로 그어진 노력은 고스란히 있었다. 꾸밈없이 묻어나오는 부족함은 강렬했고 실수와 결핍에서 나오는 선들에 나는 점점 동화되었다. 그것들이 나와 닮아 있어 눈물까지 흘렀다.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며 짜증내는 모습이 눈에 비치는 듯해 동질감마저 느꼈다. 투덜거림이 들리는 것 같은 스케치들은 상상이상으로 생동감이 넘쳤고, 종이와 흑연으로 그려내는 입체적인 서사가 나를 사로잡았다. 섹션의 절반 정도를 지나면서부터는 울컥하는 눈물이 왜인지 멈추지 않아 걸음마저 느려졌다. 

그가 남긴 감추느라 바쁜 부족함들을 목도하며 과몰입한 난, 감정을 감추느라 혼났다.

그때 봤던 부족함의 결실들은 내게 익숙할 정도로 공부와 연습의 과정에서 나오는 흔한 실수들이었다. 미흡하더라도, 확신 없고 완성된 것이 없어도 고작 연필 한 자루 쥔, 그 순간을 놓지 않아야 부족함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봤고, 그 흔적이 결국 감추느라 혼나는 눈물로 결실을 맺음을 봤다.

여과 없이 휘갈기고 미흡하게 반복해서 기어이 맺은 부족함의 결실이었다.

붓이 무거운 요즈음, 감추고 싶은 마음의 크기만큼 스케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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