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NEWS=조성일 기자] 몇 년 전 한 기업인이 “두 번 상속하면 회사가 사라진다”라고 말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모든 기업이 영원히 영위하고 싶은 꿈을 꾸지만 그만큼 가업을 승계하여 지속하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일 터, 하물며 100년을 이어간다는 건 실현하기 어려운 꿈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손꼽아 보면 우리나라에도 이름하여 ‘백년기업’의 명예를 쌓은 기업이 열댓 개나 있다. 이제 또 하나의 ‘백년기업’이 당당하게 명함에 ‘백 살’이라고 새긴다. 10월 1일 창립 100년을 맞은 ‘삼양’그룹이 그 주인공이다. 이 ‘뿌리 깊은’ 기업 삼양그룹을 이끄는 CEO 김윤 회장을 탐구하며 그 장수비결을 함께 들여다본다.
임원급 대우받는 500살 된 은행나무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가면 한 대기업에서 임원 대우를 받는 은행나무가 있다. 둘레가 4m이고 높이가 14m나 되는 이 서울시 보호수는 나이가 무려 500살이란다. 이 나무는 올해 ‘백년기업’의 명패를 새기는 삼양그룹을 지키는 뿌리 깊은 나무이다.
이 은행나무는 삼양그룹이 몇 년 전 사옥을 리모델링 할 때 하마터면 베일 뻔했다고 한다. 애초 사옥이 이 은행나무를 고려하여 지어졌던 것이 아니거니와, 리모델링 하다 보면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여 잠시 아쉬움을 선택하고 곧바로 기억에서 삭제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삼양그룹 김윤 회장은 사옥 면적을 계획보다 줄이더라도 은행나무만큼은 손대지 말라고 해 그 자리에 그대로 뿌리를 박은 채 서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철마다 영양제 주사를 놓는 등 정성을 다해 보살피는데, 그 비용이 임원급 연봉이 들어간단다.
아무튼 이 에피소드는 기업 경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거 같지는 않다. 그런데도 글머리에서 지나치리만치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건, 그 행간에 깊은 의미가 숨어 있을 거 같아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던가. 아마도 삼양그룹이 100년을 이어오게 한 기업 정신이 바로 이게 아닌가 싶다.
작다면 작은 나무 하나에도 이처럼 진심을 다 쏟는 정성으로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들을 만나면서 믿음을 만들었고, 그 변하지 않는 믿음으로 백년기업을 일구었다면 지나친 견강부회일까.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백년기업이 적다고 한다. 대일항쟁기나 한국전쟁과 같은 격변기 때문에 기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외부적 환경과 자본 형성이 어려운 데다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계급 순서를 나누던 전통적 직업관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이 분석 틀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공통 분모는 ‘백년기업이 나오기 무척 어렵다’라는 데는 동의할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삼양그룹의 ‘백년기업’ 등극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사촌 경영’ 원칙으로 승계한 3세 경영인
백년기업 삼양그룹을 이끄는 CEO는 창업자 고 김연수 회장의 손자로, 3세 경영인이다. 여기서 잠깐 삼양그룹의 가계도를 살펴보고 가자. 삼양그룹 가문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언급할 때 자주 소환되는 기업인과 정치인들이 많다. 동아일보를 비롯하여 고려대, 경방(경성방직) 등 기업은 물론이거니와, 2대 부통령을 지낸 김성수와 국무총리를 지낸 김상협 전 고려대 총장 등이 이 가문 출신이다.
1924년 가문이 소유한 농장 경영을 위해 고 김연수 회장(김성수 동생)이 ‘삼수사’라는 회사를 설립하면서 100년 역사의 깃발을 꽂는다. 회사 이름이 ‘삼양사’로 바뀐 건 1931년인데, 이때 방적 사업에 진출한다. 그러고 1955년에 제당 공장을 설립해 지금 우리 소비자들이 ‘삼양’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연관검색어 ‘설탕’ 사업에 뛰어들었다.
시니어 세대들에게 재계 톱 기업으로 기억되는 삼양그룹은 이후 끊임없이 성장, 발전하면서 지금은 화학, 식품, 의약 바이오, 패키징 등 4개 핵심사업을 펼치면서 13개 계열사를 거느린 준 기업집단의 반열에 올라 있다. 혹시 이름이 비슷해 ‘삼양라면’를 만드는 ‘삼양식품’을 오해할지 모르겠는데, 전혀 관련이 없다.
이런 역사와 가문의 전통 속에서 성장해 온 삼양그룹은 ‘사촌 경영’이란 독특한 전통을 세워 실천하고 있어 눈에 띈다.
삼양그룹은 창업자의 아들들인 셋째아들 고 김상홍과 다섯째아들 고 김상하 회장에 이어 김상하 회장의 조카이자 김상홍 회장의 아들인 김윤 회장에게로 그룹 경영이 승계되었다. 아울러 김 회장의 동생인 김량 삼양사 부회장과 사촌인 김상하 회장의 장남인 김원 삼양사 부회장과 차남인 김정 삼양패키징 부회장도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 사촌 4명은 할아버지가 세운 경영철학을 지키며 또 다른 100년을 위해 뛰고 있다.
고 김연수 창업자의 정신은 “분수를 지켜 복을 기르고(安分以養福), 마음을 너그럽게 하여 기를 기르며(寬胃以養氣), 낭비를 삼가하여 재산을 기른다(省費以養財)”라고 한다. 이는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삼양훈’이자 정신적 가치이다.
흔히 경영권을 두고 다툼이 끊이질 않는 우리 경영계 풍토를 놓고 보면 사촌 4명이 아무런 잡음 없이 기업을 성장 발전시키는 걸 보면 상당히 이례적이다.
사실 김윤 회장의 지분은 사촌인 김원 삼양사 부회장보다 낮을 뿐 아니라 김정 삼양패키징 부회장에 이어 3대 주주라고 한다. 그런데도 김윤 회장이 그룹 회장이 될 수 있었던 ‘사촌 경영’이란 대원칙 때문이었다.
김윤 회장이 지난해 창립 99주년 행사를 창업주의 생가가 있는 전북 부안에서 ‘헤리티지 워킹(Heritage Walking)’이라는 제목을 달고 연 걸 보면 창업 정신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창업주 고 김연수 회장이 생전에 역사와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직접 복원하여 전라북도기념물로 지정된 생가를 비롯해 고창갯벌식물원부터 창업주가 간척사업을 통해 축조한 해리염전까지 총 6.8km의 둘레길을 함께 걸으며 염전 축조의 과정과 창업주의 개척정신을 되새겼다고 한다.
‘정도경영’과 ‘중용정신’
김윤 삼양그룹 회장 얘기를 하려다 보니 불가피하게 창업자와 백 년 역사를 거칠게나마 먼저 훑어볼 수밖에 없었던 터여서 이제야 김윤 회장에 초점을 맞춰본다.
김윤 회장은 앞에서 보았듯 정치계든 경제계든 어느 분야에서든 하나 부러울 게 없는 ‘금수저’이다. 큰할아버지가 세운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와 미국 몬터레이국제연구학교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한 후 프랑스에 기반을 둔 루이드레이퍼스사(Louis Dreyfus Co.)에 잠시 근무하다 1985년에 삼양사에 들어가 경영수업을 시작한다.
그러고는 줄곧 삼양사에서 요직을 두루 거쳐 1996년에 대표이사 사장, 2000년에 대표이사 부회장을 거쳐 2004년에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다. 2011년부터는 지주회사인 삼양홀딩스 회장을 맡고 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정도경영’ 원칙을 고수하는 김윤 회장은 지난 100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외 환경에 맞서 농업, 제당, 방직, 화학, 의약∙바이오 등 다양한 사업으로 외연을 확장하며 진화해 온 백년기업 삼양을 관통하는 정신은 ‘정도(正道)경영’과 ‘중용(中庸)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김 회장은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경영철학으로 성장을 주도해 왔다.
아마도 김 회장의 이 같은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혁명은 없었지만 진화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가 아닐까 싶다.
김 회장은 외부 경영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스페셜티 제품과 글로벌 중심의 사업 포트폴리오 고도화 △캐시플로우(Cash Flow, 현금흐름) 중심 경영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가속화 실천 등 한 3대 경영방침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김 회장은 특히 다시 시작하는 100년을 위한 성장 동력을 ‘스페셜티(Specialty, 고기능성)’라는 한 낱말로 압축한다. 김 회장은 “스페셜티 사업을 강화해 글로벌 스페셜티 기업으로 도약할 방침”이라며 “그동안 인류에게 필요한 걸 제공하며 생활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만들었다면, 앞으로는 한 단계 나아가 인류의 삶을 바꾸고 진보시킬 수 있는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기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반도체, 2차전지 및 퍼스널 케어 소재와 차세대 대체 감미료, 생분해성 봉합사 등 그룹의 핵심 스페셜티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대, 육성해 사업 포트폴리오를 스페셜티와 글로벌 중심으로 고도화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김윤 회장은 특히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익숙한 과거에서 정답을 찾지 말고 열린 생각과 새로운 관점으로 무한한 내부의 잠재력을 깨워 새로운 길을 찾으라고 말한다.
현장에 남다른 신경을 쓰는 김윤 회장은 과장급 이하 젊은 직원들로 구성된 C&C(Challenge & Change) 보드를 운영해 직접 소통하는 한편 ‘팀장과의 대화의 시간’ ‘신입사원과의 대화의 시간’을 통해 격의 없는 커뮤니케이션에 적극적이다.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안정 추구와 현실 안주의 관행을 허물자는 의미에서 탈보수, 탈전통, 그리고 질 추구를 강조하는 김윤 회장. 장수 기업 삼양의 올해를 ‘뉴(New) 삼양’이라고 규정하고, 다시 태어나는 변화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했다.
이제 삼양은 또 다른 100년을 시작하는 출발점에 서있다. 남다른 각오로 그 출발선에 선 김윤 삼양그룹 회장이 이루어 낼 뉴삼양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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