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0일!] '매국노 아들' 주홍글씨… 그가 조국에 들어온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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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0일!] '매국노 아들' 주홍글씨… 그가 조국에 들어온 이유

머니S 2024-08-10 07:16: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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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8월10일. 한국 농업 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우장춘 박사가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우 박사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 당시 연구 중인 모습. /사진=뉴시스 1959년 8월10일. 한국 농업 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우장춘 박사가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우 박사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 당시 연구 중인 모습. /사진=뉴시스
1959년 8월10일. 한국 농학 발전에 평생을 바친 우장춘 박사가 세상을 떠났다.

우 박사는 친일 행위를 했던 아버지의 과오를 갚기 위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왔다. 농업기술이 전무했던 광복 후 한국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던 그는 만성 위·십이지장 궤양을 앓다가 눈을 감았다.

매국노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방인이었던 그는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했던 우장춘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는 1898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했던 우범선과 일본인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진=농촌진흥원 우장춘 박사는 1898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했던 우범선과 일본인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진=농촌진흥원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우범선이다. 우 박사는 친일파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조선 훈련대대장을 역임했다. 그러던 중 일본인 자객과 공모해 명성황후를 시해했고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3년 나라를 배신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은 명성황후의 원한을 갚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군인 고영근에게 암살당했다.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은 우 박사는 잠시 보육원과 사찰에 맡겨졌다가 집안 사정이 안정되면서 다시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 우범선은 한국인이었지만 출생도, 자란 곳도 모두 일본이었던 우 박사에게 한국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던 그가 한국인으로 각성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16년 도교제대 농학실과에 입학한 우 박사는 조선의 도지사가 방일해 조선계 학생을 대상으로 친일 연설을 하는 강당에서 와세다대학에 다니던 한국인 유학생이자 독립운동가인 김철수가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네놈이 그러고도 조선인이냐"고 항의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을 목격한 뒤 우 박사는 김철수와 만났다. 김철수는 우 박사가 친일파인 우범선의 아들이며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당신 아버지가 매국한 것을 속죄하려면 조선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첫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지속해서 만남을 이어갔는데 김철수는 우 박사에게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주고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일깨워줬다.

조국 돌아와도 차별 여전… 끝까지 포기 안한 한국 농업 발전

우장춘 박사는 도쿄제국대 농학실과 졸업 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 기수로 취직했다. 학벌이 높았음에도 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했던 탓이다. 그러나 그는 농학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1936년 5월4일 도쿄제국대에서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도쿄제국대에서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농학박사였던 우 박사는 농업 생산력이 부족했던 한국에 필요한 고급인력이었다. 광복 후 1949년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창설한 이승만 정부는 우 박사에게 연구소 운영을 부탁했고 그는 1950년 3월8일 자신의 조국으로 들어왔다.

일본에서도 한·일 혼혈이라며 차별당했던 우 박사는 조국에서도 같은 이유로 무시당했다. 조국이 그를 필요로 해 돌아왔지만 언제든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의심과 과거 일제 탄압을 겪었던 이들의 차별은 그를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아버지의 과오를 알았던 우 박사는 차별이 팽배한 상황에도 묵묵히 자기 일을 감당했다. 우 박사는 채소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벼의 수도이기작을 연구했다. 또 농가에 수익을 줄 수 있는 감자, 무, 배추 등을 개량했고 제주·거제 등 남부지역에서 귤 재배 가능성을 시험했다. 해당 연구를 통해 제주의 감귤산업이 현재까지 계속됐다고 볼 수 있다.

일제 식민지를 거쳐 6·25 전쟁을 겪은 한국은 농업 기술이 전무했다. 우 박사는 국민이 먹고 살 수 있는 농업 기술을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매국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는 마지막날까지 자신의 자리에서 조국을 위해 일했다.

한국에 온 지 9년 만에 우장춘 박사는 만성 위 십이지장 궤양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초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사진은 우 박사 장례가 진행되는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한국에 온 지 9년 만에 우장춘 박사는 만성 위 십이지장 궤양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초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사진은 우 박사 장례가 진행되는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한국에 온 지 9년째 되던 1959년 우 박사는 연일 과로하며 몸을 보살피지 못해 만성 위·십이지장 궤양을 앓게 됐다. 국립의료원에 입원해 수술까지 받았으나 병세는 더욱 악화됐다.

한국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몇 시간 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평생을 차별받았던 우 박사를 드디어 인정해준 것이다. 상을 받은 우 박사가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다"며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도 전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 박사의 병은 치료될 수 없었고 그는 조국의 인정을 확인한 뒤 숨을 거뒀다.

조국을 향한 우 박사의 진심에 당시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초로 거행된 사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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