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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여자는 관리가 될 수 없습니까? 그래, 여인으로서 관모에 손댈수 있는 자는 오직 초선뿐이란다.
초선관모는 담비[貂] 털과 매미[蟬] 날개로 만들어 망가지기가 쉽다. 삼공이나 그 이상 가는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의 집에나 황제의 곁에는 그 관만을 모시고 손보는 여인을 둔다. 그런 여인을 초선이라 부른다.
그러면 저도 초선이 되겠습니다. <51~52쪽>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거짓말을 하다 보면 어느덧 그것이 참이 되기도 한다. 시늉도 백 번이 되고 천 번이 되면 더는 시늉이라 할 수 없게 되는 이치다. 하지만 신분만은 시늉으로 고칠 수 없다. 천출이 천 번 만 번 귀인 행세를 해봤자 무소용이다.
저 스스로 천하다는 것을 잊어야 진정으로 귀한 행세를 할 수 있는데, 천하지 않으려 애씀이 이미 천한 것이다. 제가 천한 것을 모르면 귀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불운하게도 나는 내가 천한 것을 알고 말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를 아는 사람은 천하에 나 하나뿐이어야 했다. <58쪽>
“네가 직접 태평도를 믿는다 말하지 않아도 결국은 다른 이들이 증언하게 될 거야.”
나는 두화가 머리를 비벼댄 발끝을 내려다보며 무심히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갇혀서 굶는 시간만 늘고 아무 좋을 것 없겠지. 지금 태평도를 믿는다 말하면…….”
두화가 무엇을 좋아했더라,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원하는 것을 좀체 숨길 줄 모르는 아둔한 아이였는데 뭘 좋아했는지 많이는 떠오르지가 않았다.
“구운 닭고기를 먹게 해줄게.”
나는 두화가 눈물도 거의 흘리지 못하면서 어린아이같이 큰 소리로 엉엉 우는 것을 보며 곳간을 나왔다.
저녁상에는 닭고기 구이가 올라왔다. <107쪽>
동중영에게는 사람다운 마음이 거의 없었다. 잃으면 애타고 잊히면 서럽고, 뒤처지면 분하고 이기면 양양하며 들키면 민망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품을 법한 마음이 온통 미미했다. 어쩌면 그래서인가, 그가 나를 귀여워한 것은. 그가 그렇듯 나에게도 어딘지 결여된 바가 있다는 것을 알아봄이 아닐런가. <190~191쪽>
달아나야 해.
거울 속의 아프고 미친 여자가 내게 말했다.
그러나 어디로?
내가 여자에게 물었다.
거울 속의 여자는 답을 몰라 내 눈길을 피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226쪽>
나는 이제 아무도 애모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귀애받지 않는다.
계절을 따라 품을 팔아 입에 풀칠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버섯이든 풀뿌리든 캐다 먹는다. 이처럼 사는 것도 별다르게 어렵지는 않다. 한때 나는 지체 높은 이의 양녀였고, 가기였고, 또 한때는 거지였고, 이웃과 바꿀 먹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 명운이 삼공구경과 다를 것은 무언가. 천자와 다를 것은 무엇인가. 영웅은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고 새 나라가 또다시 망하고 흥하는 것은 그보다도 더 쉽다.
그러한 모든 순리는 허망한 것이로되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내가 움막을 짓고 사는 산자락에는 담비가 살고 여름이면 매미가 운다. 머리 위에 초貂와 선蟬을 이고 사니 부러울 것이 없다.
숱한 영웅들의 의기와 용맹을 구경거리 삼고 나라를 세우고 무너뜨리는 대의와 명분을 우스개로 여기며 끝끝내 오래도록 나는 살아남고 만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230~231쪽>
[정리=이세인 기자]
『폐월; 초선전』
박서련 지음 | 은행나무 펴냄 | 244쪽 | 16,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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