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릴과 그의 가족은 시리아 내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곳을 떠났다. 당시 그는 서부 시리아의 홈스 지방에서 택시 운전사인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두 명의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홈스는 내전 전 150만 명이 거주하던 시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2011년 초 주민들이 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봉기를 지지한 이후 내전의 주요 전장이 되었다.
"우리 마을은 두 산 사이에 있었고, 매일 밤 충돌이 있었습니다"라고 칼릴은 회상했다.
"정부 군인들과 반군이 서로 총격전을 벌일 때 총구에서 불꽃이 나오는 것을 보았어요. 너무 무서웠습니다."
2015년 말, 반군 세력이 홈스를 떠났다. 이제 이곳은 정부의 손에 넘어갔다.
봉기 동안 수만 명이 '반테러법'에 따라 억류되었는데, 이 법은 거의 모든 평화적 반대 활동을 범죄화했다. 칼릴의 아버지 이브라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정부가 아버지를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가 나왔을 때, 우리는 가족으로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시리아를 떠나기로 결정했어요."
이렇게 10년간의 난민 소년으로서의 칼릴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목적지: 레바논
시리아 내전이 시작된 이후 1,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난민이 되었고 그 중 600만 명 이상이 시리아를 떠났다.
대략 150만 명의 시리아인이 인구 약 530만 명의 레바논에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난민 비율이다.
칼릴의 가족도 레바논을 첫 번째 목적지로 삼았다. 그들은 거의 1년 동안 시리아인 친구의 집에서 지냈지만, 결국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비행기를 통해 합법적으로 튀르키예로 이동했다.
튀르키예는 내전이 시작된 이후 시리아인들에게 개방 정책을 채택했고, 현재 360만 명 이상의 등록된 시리아 난민을 수용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한 국가다.
칼릴과 그의 가족은 튀르키예의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에 정착했다. 이스탄불은 1,600만 명의 인구 중 50만 명 이상의 시리아인을 수용하고 있다.
그들은 이곳에서 4년을 살았지만, 현지인과 난민 사이의 긴장이 증가함에 따라 사회에 통합되기 어려웠다.
"이스탄불에서튀르키예 아이들이 저에게 '왜 시리아로 돌아가지 않니?'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많은 문제에 직면해야 했어요. 하지만 울기만 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삶을 계속 이어가야 했습니다."
2019년 중반, 튀르키예가 시리아인 수백 명을 강제로 본국으로 송환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튀르키예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비슷한 상황을 두려워한 칼릴의 가족은 이동하기로 했다. 그들은 에게 해를 건너 그리스로 가기 위해 남서 해안의 보드룸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세 번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네 번째 시도에서야 약 50명이 탑승한 보트를 타고 칼릴과 그의 가족은 그리스 코스 섬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우리는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고 안전했으며 신에게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칼릴은 말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 올림픽: 태권도 국가대표에서 난민으로…포기하지 않은 '금메달'의 꿈
- '그리스 해안 경비대가 난민들을 배 밖으로 던져 죽였다'…목격자들의 이야기
- '이곳은 창살 없는 감옥입니다'…르완다로 보내진 스리랑카 난민 이야기
'아들아, 정말 확신하니?'
하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2020년 그리스 해역에서 튀르키예로 강제 추방되는 이민자와 난민 사례가 보고되었다.
인권 단체들은 망명 신청자에 대한 그리스 정부의 부당 대우를 비판했다. 당시 그리스 당국은 이민자를 부당하게 대우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브라힘은 그들의 차례가 올까봐 두려웠다. 칼릴은 자신이 가족과 떨어져 홀로 유럽으로 떠나겠다고 제안했다.
"처음에 아버지는 안 된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신 후, '아들아, 정말 확신하니?' 라고 물으셨고 저는 '네'라고 대답했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그래, 준비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족을 떠나 2020년 10월, 13살의 칼릴은 다른 난민 그룹과 함께 알바니아로 출발했다.
그들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165km 이상을 걸었고, 음식은 없었지만 에너지를 위해 참치와 초콜릿만 가지고 있었다.
그 난민 그룹은 길을 위한 물과 침낭을 준비했다. 그들은 가끔씩 휴대폰으로 힘든 여정을 촬영하며 농담을 주고받는 등 서로의 사기를 북돋았다. 이 기억을 도착지에 도달하면 가족과 공유할 예정이었다.
2주간의 여정 끝에, 그들은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에 도착했다. 그러나 더 나아가기로 결심하고, 이내 인접한 세르비아로 향했다.
2020년 11월, 칼릴은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저는 끝났어요, 정말로 지쳤습니다"라고 그는 새벽 5시에 휴대폰 카메라로 자신을 촬영하며 말했다. 이것은 곧 가족에게 보내질 그의 가상 엽서 중 하나였다.
여러 차례의 시도
궁극적으로 칼릴은 세르비아 서쪽으로 더 이동해 오스트리아나 네덜란드로 가고 싶어했다.
그는 EU 국경을 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다: 헝가리 11번, 크로아티아 3번, 루마니아 1번.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4개월 동안 시도한 후, 그는 극한의 날씨에서의 긴 도보로 인해 건강에 문제가 생겼고 이러한 여정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베오그라드에 정착해야 했다.
추정에 따르면, 2015년 이후 전 세계에서 온 백만 명 이상의 이민자와 난민이 EU 국가에 도달하기 위해 이른바 발칸 루트를 탔다.
유럽 난민 및 망명 위원회(ECRE)는 매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밀수업자나 보안 및 국경 부대에 의해 폭력과 괴롭힘을 당하고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다양한 건강 위험에 직면했다고 보고했다.
"저는 베오그라드를 제 도시라고 느끼지 않지만, 여기서 매우 행복합니다"라고 현재 17세의 청년이 된 칼릴은 BBC 뉴스 세르비아에 말했다.
지난 3년 동안 세르비아의 수도는 칼릴의 새로운 집이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영어와 세르비아어를 배웠으며,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여기가 내 방이고, 이것이 내 그림들입니다. 저는 여가 시간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는 세르비아에서 아동 난민을 돕는 비정부 기구 중 하나인 예수회 난민 서비스(JRS)가 제공하는 소박한 쉼터를 보여주며 말했다.
벽에 핀으로 고정된 그림 중 하나는 그의 어머니 이름의 첫 글자가 하트 모양으로 섞여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바다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천사 같은 날개를 가진 소녀의 그림이었다.
"그 소녀는 외로워 보입니다. 제가 그 당시 느낀 외로움을 표현하고 싶었어요"라고 칼릴은 말했다.
"그리스, 알바니아, 코소보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 이후에 저는 너무 지쳤어요. 저는 여기 도착했을 때 '신에게 감사합니다, 이제 좀 쉴 수 있겠군요'라고 생각했어요. 제 삶은 이제 완벽합니다. 편히 잘 수 있고, 학교에 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장: 가족 재회
칼릴이 세르비아에 있는 동안 그의 아버지와 여동생들은 여전히 그리스에 있었지만, 어머니는 네덜란드에 도착하여 난민 지위를 얻는 데 성공했다.
2023년 9월 가족은 재회 자격을 얻었고 몇 달 후 칼릴은 네덜란드에서 가족과 재회할 수 있었다. 그는 거의 4년 동안 사랑하는 가족을 보지 못했다. 이제 그들은 모두 망명을 허가받았다.
그는 내년에 대학에 진학해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기를 희망한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가족과 함께 평화로운 삶을 살며 전쟁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습니다." 그는 말했다.
"제 인생의 경험은 저에게 스스로를 믿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 어떻게 이민자 문제가 이번 미 대선의 핵심 쟁점이 됐나
- 헤즈볼라-이스라엘 갈등… 실향민들의 집으로 변신한 낡은 호텔
- 영불 해협에서의 죽음 … 14세 소년은 왜 죽음의 길에 올랐을까
- 파키스탄의 '미등록 외국인 추방'에 두려움에 떠는 아프간 난민들
- BBC에 걸려온 구조 요청, 트럭에 갇힌 여성 6명 구출 도왔다
- ‘중국 인권운동가’로 추정되는 남성, 제트스키로 한국 밀입국
Copyright ⓒ BBC News 코리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