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소는 미얀마 동부 카렌니 주에 있는 한적한 정글 마을이다. 그런데 현재 이곳에 혁명에 대한 열정이 타오르고 있다. 변화는 마을 주요 도로를 따라 그을린 붉은 땅 위에 새롭게 지어지는 상점과 카페에서도 느껴진다. 이 곳의 화두는 단 한 가지, (군부 정권에 대한) 저항이다.
이곳의 소수민족들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통치해 온 군부에 수십 년째 저항해 왔다. 그리고 3년 전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로 민주주의 전환이 막히자, 젊은 투사들과 활동가들이 이 마을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처음 맛본 민주적 자유를 빼앗긴 뒤, 거리로 나와 시민 불복종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을 막아선 건 폭력과 체포였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양곤 등의 도시를 떠나, 외딴 정글 속에 자리한 기지로 모여들었다. 시골을 중심으로 확산중인 반군에 합류한 것이다.
이곳에 새로 문을 연 칵테일바 ‘양곤 바이브’에선 장발의 래퍼 노벰 쑤(33)가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이 곳은 원래 일렉트릭 블루 마르게리타가 유명하지만, 그는 좀 더 어두운 느낌의 칵테일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의 주위에선 반군의 성과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노벰은 “우리에겐 군대를 파괴하는 플랜 A만 있을 뿐, 플랜 B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군인은 아니지만, 하루 대부분을 최전선에서 저항군과 함께 보낸다. 그는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내 임무”라고 했다. 노벰의 음악은 피를 끓게 한다. 영상 속에서 그는 무기를 휘두르기도 하지만, 실제 무기가 아니라 동생의 장난감 총이라고 했다.
해가 지면, 양곤 바이브는 조명에 암막 블라인드를 친다. 군부의 드론과 전투기를 피하기 위해서다. 이 지역엔 정기적으로 폭격이 떨어진다. 혁명 세력의 라디오 방송국인 ‘패더럴 FM’ 역시 공습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하고자, 이동식 송신기로 마을 밖에서 방송을 송출한다.
카렌니 주 대부분 지역에는 전기가 없고, 모바일 네트워크도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군부 정권이 차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에서는 무료 인터넷을 쓸 수 있고, 도로 주변 카페에서도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 위성 서비스 ‘스타링크’ 덕분이다.
현재 정글에 있는 은신처에서 민첩하고 효과적인 저항 전쟁을 펼치는 주역은 바로 타인과의 연결을 좋아하는 이들 세대다. 이들이 펼치는 반란은 수년 간 이어진 미얀마 군부 통치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저항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군부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수백 명의 언론인을 투옥했기 때문이다. 군사 정부의 승인을 받은 취재에선, 이 이야기 속 저항군의 입장을 담을 방법이 없다.
우리는 미얀마로 들어가 카렌니 주 일대에서 싸우고 있는 저항 단체들과 한 달간 함께했다.
데모소 외곽의 비포장 도로에서 우리는 도시를 떠나온 사람들의 은신처로 이동했다. 대나무로 지어진 작은 숙영지에선 최근 이곳에 왔다는 15~23세 사이의 청년 8명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양곤에서 밤마다 시골길을 걸어,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현재 미얀마의 주요 도시에는 군부의 새 징병법에 반대하는 이들을 위한 “지하 철도”가 구축되어 있다. 임시 은신처와 담당자, 은밀한 경로를 거쳐 카렌니와 같은 저항 세력의 근거지로 갈 수 있는 길이다.
이들 중에는 자동차를 이용한 이들도 있고, 오토바이나 보트로 이곳까지 온 이들도 있었다. 군부의 검문이 있을 때는 야외에서 밤을 지냈다. 한 번은 군인들이 모든 젊은이들을 차에서 내리게 한 뒤, 서류를 검사하고 휴대전화를 뒤졌다. 다행히 젊은이들은 이를 예상하고 휴대폰에서 빌미가 될 만한 내용을 미리 삭제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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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혁명 반란군이 잊혀진 전쟁의 흐름을 바꾸고 있다
이 젊은이들은 어찌 보면 이 황야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다. 세련된 장비를 착용하고 스타링크 덕에 휴대전화를 이용하는 그들과 인근 숲에서는 울음을 토해내는 매미는 사뭇 어색한 조합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검문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 도시에서 입던 옷을 숨기고 마을 주민으로 변장했다고 한다.
쑤라 역시 이곳까지 오는 여정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날 밤은 두려움에 떨며 잠을 잤습니다. 가본 적도 아는 사람도 없는 곳이었거든요. 아침에 다른 사람들이 저를 데리러 왔고, 무사히 여기까지 데려다 줬어요.”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들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모두 가명을 사용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도시에 있는 가족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커다란 배신감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2015년 반세기가 넘는 군부 통치를 마감하고 시작된 미얀마의 민주주의 전환기에 성장했다. 하지만 2021년 군부 쿠데타로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간 정부가 무너졌고, 자유에 대한 약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들 대부분은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장 반군 단체인 카렌니민족방위군(KNDF)을 통해 한 달간 기초 군사 훈련을 받았다.
KNDF는 쿠데타 이후에 만들어졌다. 카렌니족 저항군을 비롯해 여러 소수민족이 저항을 위해 힘을 합쳤다. 이들은 카렌니 주의 90%에서 군부 정권의 군대를 몰아냈다고 주장한다.
저항군에 참전한 티하에게 “왜 무기를 들기로 했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에게는 군부를 위해 싸우거나 혁명군에 합류하는 것,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내가 군부 정권 군대에 합류하면, 내 동족을 괴롭히고 죽여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싸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혁명에 힘을 보태는 사람들도 있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우리는 나무가 두껍게 덮인 정글 길을 따라 민간인과 저항군을 치료하는 비밀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 외관은 그동안 내가 보았던 의료시설들과 달랐다. 외부에는 오두막과 대피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니 스캐너와 엑스레이 기계, 60개의 병상이 있었다.
이러한 교란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이전 병원은 군부의 폭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요리(28)는 1년 전 이곳으로 온 의사다. 그를 만난 작은 회색 건물은 새로 심은 초목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 건물에 지하 수술실이 있었다. 그는 이런 위장이 군부의 전투기가 폭격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회복 병동의 흙바닥 침대에 누워 있는 남성과 여성들 중 상당수는 팔다리를 잃은 상태였다. UN은 미얀마에 엄청나게 많은 지뢰가 매설되어 있고, 쿠데타 이후 지뢰로 인한 부상자가 크게 늘었다고 밝혔다.
미얀마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지금까지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중 상당수는 어린이다. 군부는 반군 지역에선 민간인과 저항군을 구분하지 않는다. 모조리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표적으로 삼는 것이다. 내가 병원을 방문하기 며칠 전에도 인근 마을에서 두 살과 여섯 살 아이를 포함한 일가족 6명이 공습으로 사망했다.
다른 병동에선 정글 매미의 울음소리를 뚫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곳에서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즉 젊은 혁명가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카렌니는 의료 시설이 부족한 주였다. 그래서 현재 이곳에 있는 의료진은 현지인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이들이다.
요리의 약혼자 트레이시도 그중 한 명이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 그는 포격으로 부상당한 남성의 수술을 매듭짓고 있었다.
요리와 트레이시는 의대를 졸업하지 못했다. 양곤에서 졸업 학기를 보내던 중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들은 쿠데타를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트레이시는 학생회장이기도 했다. 군부는 그와 요리를 체포하기 위해 영장을 발부했다.
처음에는 이들도 무기를 들고 싸우려 했었다. 하지만 카렌니 주에서는 의료 기술이 더 쓸모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3개월 전부터 이들은 새 병원을 열었고, 현재는 대부분 30세 미만인 직원 35명과 함께하고 있다.
우리는 병원 식당에 앉아 인스턴트 커피를 마셨다. 나는 그들에게 정글 생활의 어려움과 환자가 입은 끔찍한 부상에서 오는 정신적 충격에 대해 물었다.
요리는 “오늘 아침에 봤겠지만 환자들의 정신력은 매우 강인하다”며 “그게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팔다리가 절단된 군인들도 저렇게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데, 우리가 포기하겠습니까?”
트레이시도 “하루종일 우는 날도 있지만 상관 없다”며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없으면 누가 저 환자들을 치료하겠어요?”
커피를 마시다 보니, 그들이 집에서 아주 멀리 떠나와 있고 전 세계 대부분이 거의 알지 못하는 분쟁 속에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들도 미얀마 전쟁이 잊혀졌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네, 조금은요.” 요리가 대답했다. “세계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유 없이 내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우리가 싸우는 데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두 사람은 작년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군부의 공세로 병원에 사상자가 속출할 수 있다는 전망 때문에, 결혼식을 연기했다. 이번 달로 예정됐던 결혼식도 같은 이유로 다시 미뤄졌다. 요리는 “아마도 올 12월쯤에는 결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트레이시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카렌니의 주도인 로이코는 전쟁으로 인해 거의 버려진 도시나 다름없었다. 이곳에선 작년 11월부터 KNDF와 군부의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다.
한창 더웠던 4월의 어느 날, 도심 대로와 공원은 까마귀 소리와 간간히 울리는 총소리만 들릴 뿐 무거운 적막감에 쌓여있었다. 군부의 공습과 무장 드론, 박격포 및 포격으로 완전히 파괴됐기 때문이다.
도시에 있는 군부의 주요 기지에는 여전히 군인들이 있고, 헬리콥터를 이용한 보급도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상에서는 반군 세력이 그들을 포위한 상태다.
샘과 코브라는 둘 다 20대 초반으로, 13년 동안 서로 알고 지낸 사이다. 학교도 로이코에서 함께 다녔다. 한 때 가라테 챔피언에 올라 양곤까지 갔지만, 지금은 군부와 대치중인 분쟁의 수도 최전선ㅇ으로 돌아왔다. 이들이 무장 혁명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KNDF에 있는 젊은 전사들 대부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 코브라는 가라테에서 종합 격투기로 전향했고, 양곤에서 트레이너로 돈을 벌고 있었다.
그는 “쿠데타 이후 우리는 평화 시위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군대가 총을 쏘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어요.” 샘은 국제 대회 참가를 위해 해외로 나가기 전까지는 정치와 관련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일본에 갔을 때, 내 조국이 지금과 같은 모습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코브라는 방탄복을 입고 있었다. 미얀마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내가 만난 다른 무장 저항군 중에 방탄복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그는 철판 주머니 속에서 직접 만든 철판을 꺼내며, 진짜 방탄복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총알을 막지는 못하겠죠. 하지만 대부분의 부상은 파편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의 팀원 모두가 부상을 입었고, 일부는 수 차례 부상을 입기도 했다.
한 추정에 따르면, 기존 무장 저항 세력과 소수 민족이 힘을 합쳐 군부에 맞서며 미얀마 군부는 국토의 절반에서 3분의 2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카렌니의 저항 세력은 대부분 정글 깊숙한 곳에 있는 기지에서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길을 따라 은신해 있다. 때문에 그 규모를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지뢰가 끊임없이 위협을 가하는 이곳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외진 곳에 있는 한 길에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연주곡 소리를 희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고향을 떠나온 26세의 모우 흐프레이 미아르가 이끄는 연주였다. 그의 주위에는 수십 명의 학생들이 저마다 악기를 들고 함께 연주를 하고 있었다.
음악은 미아르의 무기이고, ‘글든 플라워 뮤직 스쿨’은 전쟁의 소음을 차단한 아이들의 안식처다. 이곳에는 14세부터 20세까지, 다양한 연령의 아이들이 있다.
전쟁은 수많은 삶을 파괴했다. 미아르는 아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돕는 게 혁명을 위해 자신이 기여하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쟁을 마냥 모른 채 할 수도 없는 일. 나는 그에게 학생 중 일부가 이곳을 떠나 전선으로 갈 수도 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떨 것 같은지 물었다.
미아르는 "(그렇게 떠나는) 학생들은 자신의 팔다리와 육체, 생명을 희생한다”고 말했다. “여자친구, 남자친구를 이곳에 남겨두고 최전선으로 가는 겁니다.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헌신적이고 그 신념이 얼마나 강인한지 알 수 있어요. 저는 항상 그런 동지들을 존중하고 존경할 겁니다.” 내가 (전선으로 가는 학생들 중) 일부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자, 그녀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미아르와 아이들은 영어 노래 ‘노웨어 투 고(Nowhere To Go)’를 부른다. “우리에겐 평화가 필요합니다.” 그들의 노래다. “우리는 강물과 같은 정의가 필요합니다. 슬픔은 끝나야 합니다. 반드시 끝나야만 합니다.”
현재 전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태다. 카렌니 주에서 만난 그 누구도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 내다보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 각자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위장한 채로 살아가고 병자와 아이들을 돌보며 무장 투쟁에 힘을 보태는 것이다.
그들은 삶과 가족을 떠나, 전쟁이 한창인 이곳으로 왔다. 약속된 미얀마를 세우기 위한 가치 있는 희생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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