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시간을 봉인하는 예술이다”라는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말은 어쩌면 패션에도 해당되는 말인지 모른다. 지금의 패션은 옷 한 벌을 만드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옷 디자인에 담긴 시대적 단서는 물론이고 그 옷을 알리기 위한 전방위적 미디어 활동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표현하는 ‘시간을 봉인하는 예술’에 가깝다. 단편적인 이미지에 열광하는 SNS 시대는 오히려 반대로 ‘맥락’이라는 요소를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 패션 역시 이미지와 서사가 충분히 어우러져 사람들 속에 ‘이야기’로서 스며들어야 한다. 생 로랑이 이러한 시대에 발맞춰 생 로랑 프로덕션이라는 이름의 영화제작사를 차린 건 그리 엉뚱한 선택은 아니다. 과거 패션 하우스에서 영화 제작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배우들의 패션을 담당한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영화 제작에 직접 뛰어든 건 처음이다.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가 이끄는 프로덕션은 미래를 향해 브랜드를 이끌어나가며 컬렉션의 폭넓은 영화적 감성과 뉘앙스를 강조하려는 그의 의도와 맞닿아 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생 로랑이라는 이미지와 서사를 완성하고, 관객들은 그들이 영화에 담은 이야기와 장면을 자신의 삶 속에 이식하여 생 로랑이라는 맥락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생 로랑 프로덕션이 2024년 제77회 칸 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에서 총 세 편의 장편 영화,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에밀리아 페레즈(Emilia Perez)〉,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더 슈라우즈(The Shrouds)〉,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파르테노페(Parthenope)〉를 선보였다.
첫 번째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조이 샐다나, 셀레나 고메즈, 에드가 라미레즈,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 아드리아나 파즈가 출연해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리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무랄 것 없는 능력에도 저평가된 변호사 리타는 정의 실현보다는 범죄자의 혐의를 벗겨주는 일에 관심을 더 기울인다. 그러던 어느 날, 카르텔의 보스 마니타스가 그녀를 고용하며 자신이 조직에서 은퇴하고 나면 수년간 비밀리에 준비해온 계획, 즉 늘 꿈꿔왔던 ‘여성이 되려는’ 계획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시작되는 리타의 스토리가 오묘하면서도 매력적이다.
한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더 슈라우즈〉는 뱅상 카셀, 다이앤 크루거, 가이 피어스, 샌드린 홀트 등 배우 리스트만으로도 기대감을 자아내는 영화. 이 영화의 주인공은 뱅상 카셀이 분한 50세의 유능한 사업가 카르시다. 아내의 죽음 이후 슬픔에 잠긴 그는 산 자들이 수의를 입은 채 고인을 지켜볼 수 있는 혁신적이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기술, 그레이브테크를 발명하기에 이른다. 어느 날 밤, 카르시의 아내의 무덤을 포함해 수많은 무덤이 훼손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카르시가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하며 영화의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전개된다.
마지막으로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파르테노페〉는 1950년에 태어난 파르테노페의 삶을 다룬 영화다. 영웅적인 여성은 없지만 여성주의적인 서사로 자유, 나폴리, 그리고 진솔하거나 혹은 무의미하거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사랑의 얼굴을 향한 형언할 수 없는 갈망을 이야기한다. 영화는 나폴리의 카프리섬을 배경으로 스타일리시한 미장센을 펼쳐낸다.
안토니 바카렐로의 진심이 담긴 영화 세 편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는 그에게 패션의 아니, 삶의 방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옷으로는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세계를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로 표현한 셈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그 어떤 예고편보다 ‘생 로랑’이라는 세 글자만으로 이미 기대가 차오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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