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기획③] 대한민국의 서막을 연 한반도 최초의 '대통령'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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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기획③] 대한민국의 서막을 연 한반도 최초의 '대통령' 이승만

서울미디어뉴스 2024-03-25 11:49:5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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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서울미디어뉴스] 오수진 기자 = 3월 26일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태어난 지 149년이 되는 날이다.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갖은 굴곡을 견뎌낸 한반도의 역사만큼이나 1875년 조선 말 격변의 시대에 태어나 1965년 하와이에서 눈을 감기까지 이승만은 파란만장하다 못해 잔혹한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서막(序幕)을 연 한반도 최초의 ‘대통령’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사진=이승만기념관)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사진=이승만기념관)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2024년을 지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좌우 두 갈래로 나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그가 20대 청년 시절 옥중에서 왕정과는 전혀 다른 공화정이라는 근대국가를 설계하였고,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성공적으로 건설하였으며, 국내외의 실질적인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대한민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그는 5000년 역사의 한반도에 최초로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문명사적 전환을 이루어내었으며, 유라시아 전역이 공산주의의 쓰나미로 붉게 뒤덮였을 때 미국 루스벨트 정부와 트루먼 정부를 대상으로 스탈린의 공산 전체주의와 싸워야 함을 힘겹게 설득하고 관철시켜 유라시아 대륙에서 유일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한 세계가 인정하는 걸출한 인물이다. 


늦게 왕이 될 운명...‘승룡(承龍)’에서 ‘승만(承晩)’으로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났다. 이승만은 태조 이성계의 18대손으로 태종 이방원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1877년에 한성부 남대문 밖 우수현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이승만의 인 '우남'이 우수현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아호는 그의 어머니가 꾼 용 꿈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승룡(承龍)이었으나, 사주팔자를 보니 '늦게 왕이 될' 사주라 하여 그의 부모가 이름을 승만(承晩)으로 개명시켰다.

어린 시절에 서당을 다녔고 그 당시 유생들이 그러했듯 이승만도 과거시험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부패가 만연했던 당시 과거 시험에 계속 낙방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오개혁 시행으로 인해 과거시험이 사라졌다.


수많은 ‘처음’(初) 만들어 낸 이승만

① 자유와 평등을 피력한 최초의 논설가

이승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배제학당에 입학하여 6개월 만에 영어 교사로 임명된다. 그러나 이 곳에서 이승만은 영어 보다 훨씬 중요한 정치적 평등과 자유의 사상을 알게 된다. 그리고 협성회라는 조선 최초의 의회의 성격에 가까운 토론 조직의 창립멤버로도 활약한다. 1897년 배재학당의 졸업식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주제로 영어 연설을 함으로써 조선인 최초의 영어 연설가가 된다.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주간지 <협성회회보> 에서 이승만은 주필로 활약하며 자유와 평등이라는 ‘위험한’ 사상을 피력하는 등 힘 있고 탁월한 문장력으로 이름을 날렸다. 

 

② 최초의 현대시 작가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남선의 작품이 1908년에 <해조신문> 에 실렸는데 비해, 이승만의 시 ‘고목가(枯木歌)’(늙고 병든 나무의 노래)는 1898년 3월 9일자 <협성회회보> 에 실렸다. 이승만이 평생 남긴 시는 한시가 대부분이지만 ‘고목가’는 그가 남긴 유일한 한글 시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이다. 한국 시인 협회장 김종회는 2004년 10월 24일자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1898년 <협성회회보> 에 ‘고목가’가 발표된 것으로 미루어 1898년부터를 한국 현대시의 기점으로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③ 최초의 일간지 발행

1898년 4월 9일에 창간된 <매일신문> 은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였다. 이승만은 <매일신문> 의 사장 겸 주필이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우리나라에 일간지 시대를 열었으며 오늘날 신문 기사를 쓰는 ‘기자’라는 단어도 이승만이 최초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④ 최초의 옥중 도서관 운영, 최초의 영·한·한(英·韓·漢)사전 집필

903년 한성감옥에 수감된 당시 죄수복을 입은 28세의 우남(왼쪽)과 53세의 월남(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진=이승만기념관)
903년 한성감옥에 수감된 당시 죄수복을 입은 28세의 우남(왼쪽)과 53세의 월남(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진=이승만기념관)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을 때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옥중 도서관을 운영하였으며 이 시기에 영한 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한다. 정확히 표현하면 ‘영·한·한(英·韓·漢)사전’이다. 영어와 한글과 한문을 병행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승만은 또다시 최초의 기록을 남긴다. 한국인 최초의 영한사전 편찬 시도이다. 이승만은 A에서 F까지 총 8223개의 단어를 번역해 냈다. 작업에 투입된 날짜를 따져보면 하루 평균 20개 정도의 단어와 씨름한 셈이다. 만약 완성되었다면 한국 최초의 영한사전이 되었을 이 사전의 편찬 작업은 1904년 2월 러일 전쟁을 계기로 중단되었다. 

 

⑤ 우리 민족 최초의 프린스턴 국제법 박사

이승만은 ‘대통령’보다는 ‘이박사’라는 호칭으로 더 자주 불렸다. 영어학원은커녕 사전조차 없던 시기, 2년만에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획득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 낸다. 그는 우리 민족 최초의 국제법 박사가 된다. 이승만이 졸업한 조지 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은 미국에서도 그 정도의 학벌을 지닌 인물이 도시 전체 한명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실제로 이승만을 상대한 미국의 고위 관료 외교관들은 그의 탁월한 지성에 압도되었으며 “미국인보다 미국 정치, 역사를 더 잘 아는” 이승만에게 경의를 표할 정도였다. 

이승만 박사의 학위 논문은 <전시 중립론 –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이었다. 일차적으로 국제법에 관한 논문이었지만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에도 결부된 것이어서 특이하게도 세 학과로부터 공동 승인을 받았다. 이 논문은 1912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책으로 출판되었을 만큼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을 인정받았으며 훗날 1차 대전이 발발하며 공해상의 중립 문제가 부각되자, 이승만은 중립의 뛰어난 권위자로 자주 거론되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직접 이승만의 논문을 인용하기까지 했다. 다음은 이승만의 논문을 우리말로 번역한 정인섭의 평가이다. 

"이 대통령의 박사 학위 논문은 그 내용의 현재적 가치나 함의 이상으로역사적 의의를 지닌 문서이다. 우리 법학계가 이만한 수준의 논문을 다시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한 세대도 더 지난 다음의 일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승만의 이러한 활약이 당시 일제의 억압 속에 숨죽이며 지냈던 우리 민족의 가슴에 얼마나 많은 자부심과 희망의 빛을 비춰 주었을지, 지금의 ‘K컬쳐’나 ‘코리아-여권 파워’등이 주는 ‘국뽕’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슴 벅찬 일이었다. 


청년 이승만이 옥중에서 꿈꾼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의 설계도 [독립정신]

이승만이 1904년 한성감옥애서 집필한 '독립정신' (사진=이승만기념관)
이승만이 1904년 한성감옥애서 집필한 '독립정신' (사진=이승만기념관)

1904년 2월 19일 스물아홉의 청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집필하기 시작한 [독립정신]은 조선이라는 먹잇감을 놓고 벌이는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백성들을 깨우는 선각자적 외침이었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러 학자들의 입을 통해 [독립정신]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오늘날 이승만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 그의 첫 번째 저서 [독립정신]을 읽어 본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이승만에 관한 1차 자료를 하나라도 정독해 보았다면 아무리 그에게 부정적이었다 하더라도 19세기 말에 그가 가졌던 비범한 세계관, 시대를 꿰뚫어 보는 예언자적 혜안, 세계 초강대국 지도자들에 맞서 담판을 벌이는 배짱과 용기 등 그에 대한 고정관념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당시 조선의 상황과 국제 정세, 서구의 정치사상과 철학을 총 망라한 [독립정신]은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독립의 지켜내고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기 위한 강령으로 ▲마땅히 세계와 통상하여야 한다 ▲새 법으로 각각 몸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을 삼아야 한다(새로운 학문과 문물의 적극적인 도입과 활용) ▲외교를 잘 할 줄 알아야 한다 ▲국권을 중하게 여겨애 한다 ▲의리를 중하게 여겨야 한다(도덕적 각성과 충성된 용기) ▲자유 권리를 중하게 여겨야 한다 등 여섯가지 조목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근본’은 바로 개인의 마음으로 “백성들의 마음속에 있는 악한 뿌리를 뽑아내고 선량한 천성을 회복”해야만 모든 것이 바로잡힐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것이 다 사람의 마음을 바로 잡는데서 시작하는 것인데 이것은 세상의 법률로서는 바로잡지 못하고 오직 ‘교화’로서 다시말해 종교로서 그 근본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정치는 항상 교회본의로서 딸려 나는 고로 교회에서 감화한 사람이 많이 생길수록 정치의 근본이 스스로 바로 잡히나니 이러므로 교화로서 나라를 변혁하는 것이 제일 순편하고 순리한 연유니라 ... 썩은 백성 위에 맑은 정부가 어찌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반드시 백성을 감화시켜 새사람이 되게 한 후에야 정부가 스스로 맑아질지니 이 어찌 교회가 정부의 근원이 아니리요."  - [독립정신]

"우리는 마땅히 이 교로써 만사의 근원을 삼아 각각 나의 몸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자가 되어야 나라를 한 마음으로 받들어 영·미 등 각국과 동등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 [독립정신]

자유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법의 지배와 제도를 존중하면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개인을 희생할 수 있는 도덕성에 기반한 개인의 참여의식이 필수적이다. 이런 공화적 시민이 있어야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책임 있는 주체, 윤리적인 주체로서의 ‘개인’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다. 자유로운 존재가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청년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이 근본적인 작동원리가 혁명이나 새로운 문물 도입 등을 통한 단순한 구조의 변화가 아닌 책임 있는 주체로서의 개인임을 정확히 이해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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