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권선미 작가] 매년 눈이 잔뜩 쌓이는 날들 중 하루는 마음먹고 눈사람을 만든다. 뭔가 그 해 겨울에 제대로 된 눈사람을 만들지 않고 넘어가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어 영 찜찜하다.
올겨울은 눈이 내리던 날들마다 괜히 귀찮아서 눈사람 만들기를 미뤘다. 그렇게 찜찜한 상태로 올겨울이 끝나려나 싶었는데, 다행히 2월 중순 즈음 예상치 못한 눈이 내려 겨우겨우 마음을 다시잡고 올겨울의 연례행사를 무사히 마쳤다.
올겨울의 눈사람은 평소 루피를 좋아하던 친구의 추천을 받아 ‘잔망 루피’(군침이 싹 도노 ver.)를 만들어 보았다. 포크까지 양쪽으로 쥐여 주니 나는 그만 내가 만든 눈사람에 단단히 반해버리고 말았다.
입체적인 눈사람을 만드는 건 맨날 평면으로 그리던 그림과는 다른 재미가 있다. 기회가 된다면 도자기나 조각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는 나로서는 눈사람을 만드는 것이 좋은 연습이자 경험이다. 게다가 눈사람을 만드는 것은 재료도 공짜고 환경에도 무리가 가지 않는 데다 길거리에 만들어둠으로써 전시작품의 역할도 해낸다.
재작년 겨울엔 내가 사는 다세대 주택 앞 공터에 ‘무민’을 만들어 놓은 적이 있는데, 평소 얼굴도 모르던 이웃들이 눈사람을 촬영해가는 광경을 훔쳐보며 혼자 즐거워했다. 누군가에겐 아침에 일어나니 무민이 갑자기 나타나 있었을 테고, 누군가에겐 퇴근길에 집에 오니 무민이 갑자기 나타나 있었을 테다. 그런 깜짝 조형물 같은 것들이 소소하게나마 이웃들에게 재밋거리가 되었다는 것이 나에겐 장난이나 작은 기쁨 같은 것이다.
뭐 항상 이렇게 기쁘고 즐겁게만 눈사람이 소비되면 좋겠다만, 어느 날인가는 다니는 가게 앞에 만들어 두었던 눈사람을 초등학생들이 무자비하게 10초 만에 부숴버리고 갈 길 가는 광경을 현장에서 목격한 적도 있었다.
만드는 데는 30분이 걸렸다만 부서지는 건 10초뿐이더라. 하지만 내 눈사람을 부쉈다고 그 초등학생들을 잡아다 혼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서른이 넘은 여자가 내 눈사람을 부쉈다고 초등학생들을 잡아다 화를 내며 혼을 내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닌 여자일 것이다.) 애초에 재료값이 들지 않았고, 판매가가 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내 작품이라고 소중히 모셔둔 것도 아니고 길거리에 방치를 해 놓은 거니 소유권 따윈 없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사라질 거 하루나 이틀 정도 일찍 사라졌다 생각해 보면 그러려니 넘어갈 뿐이다. 뭐 또는, 그렇게 부서지는 최후를 맞이하는 것까지가 그 눈사람의 완성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나와 같은 사건을 겪은 사람들의 일화가 눈이 함박 내린 겨울이면 들려오곤 하는데, 글쎄... 종종 몇몇 사람들이 왜 눈사람에 화가 나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 그 나름의 장난이거나 작은 기쁨이겠다만?)
생각해 보면 그냥 하늘에서 내린 눈일 뿐인데. 누군가는 하늘에서 내린 쓰레기라고도 부르고, 누군가는 낭만적이라 하며, 나 같은 사람에게는 겨울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늘에서 내려 녹아 없어지는 눈이라는 물체를 애정으로 뭉치고 다듬는 고작 몇 시간 동안 그것을 사랑해 버린다. 그것을 아끼고 그것을 사랑해 나가는 과정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그런 마음들이 피어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의 작품으로 태어나 스스로를 다듬고 깎아나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언젠가 사라지는 게 당연한 눈사람처럼 언젠가 사라질 나도 세상사에 그냥 그러려니 흘려 넘기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물론 나를 부수려는 초등학생들을 봐주겠단 뜻은 아니다.)
뭐, 아무튼 누군가에게는 누군가의 정이든 작품인 눈사람을 부수는 것을 참아 달라는 당부와, 누군가에게는 눈사람에게 많은 정과 노력을 쏟은 건 알지만 그는 어차피 눈일 뿐이라서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음... 역시 후자는 위로가 잘 안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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